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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

22조원 부자, 28세 저커버그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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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스 뒤이은 황제 저커버그
정신과의사 어머니에게
인간에 대한 통찰 배웠다

지난 22일 결혼식장에서의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오른쪽)와 프리실라 챈의 모습. 결혼식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의 저커버그 자택에서 했다. 챈이 입은 웨딩드레스는 미국 디자이너 클레어 페티본의 작품으로 온라인에서 4700달러(약 550만원)에 산 것으로 알려졌다. [팰로앨토 AP=연합뉴스]

세계인구 7분의 1이 회원인 세계 최대 인터넷 사이트 하나로 세계에서 29번째 부자가 된 남자. 마크 저커버그(28) 페이스북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 이야기다. 이달 18일 페이스북을 상장해 돈방석에 앉았고, 다음 날에는 9년간 사귄 ‘첫사랑’과 깜짝 결혼식을 올려 돈과 사랑을 모두 거머쥐었다. ‘모두가 연결된 열린 세상’을 꿈꾸는, 세계에서 가장 젊은 억만장자의 삶을 들여다봤다.


영재, 조기교육으로 날개 달다

페이스북 기업공개로 돈방석에 오른 마크 저커버그. [사진 블룸버그]
 저커버그가 첫 작품을 내놓은 것은 12세 때였다. 어릴 적 살던 뉴욕주 돕스페리의 집 1층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치과의원이 있었다. 환자가 들어오면 접수하는 직원이 “환자 왔어요”라고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아버지는 환자가 온 것을 조용히 알릴 방법을 고민했다. 소문난 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 덕에 집과 병원에는 컴퓨터가 여러 대 있었다. 어린 저커버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프로그래밍 기법을 활용해 이들 컴퓨터 간 실시간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프로그램에 ‘저커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시간 메신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AOL의 인스턴트 메신저보다 한 해 빨리 나왔다.

 유대인인 부모는 아이의 재능을 일찍 알아봤다. 저커버그가 11세 때부터 컴퓨터 과외선생을 붙여 줬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던 데이비드 뉴먼은 일주일에 한 번 저커버그와 프로그래밍 작업을 했다. 훗날 그는 미국 잡지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영재였던 저커버그를 가르치는 게 좀 버거웠다”고 고백했다. 아버지는 저커버그를 집 근처 대학에 개설된 컴퓨터 강의에 등록시켰다. 수업 첫날 학교에 태워다 줬을 때였다. 교수는 아버지에게 “자녀를 데리고 수업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 저커버그만큼 어린 학생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버지가 수업을 들으려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부모는 아들을 최고 명문사립고 중 하나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 보냈다.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부모는 “(아들이) 배심원단을 100% 가까이 설득하는 유능한 변호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을 키우다

 아버지가 그에게 컴퓨터를 가르쳤다면 어머니는 ‘사람’을 가르쳤다. 정신과 의사였던 어머니 캐런은 4남매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직장생활을 접은 ‘맹모’였다. 저커버그는 “사람들은 나를 컴퓨터공학 쪽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심리학과 컴퓨터공학이 연결되는 지점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컴퓨터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동료들은 저커버그의 ‘감성지수(EQ)’가 매우 뛰어나다고 입을 모은다. “저커버그만큼 소프트웨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없지만, 그만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더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페이스북 성공의 핵심은 사람이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심리를 파고들었다. 좋은 예가 페이스북의 대표 서비스인 사진 공유 기능이다. 브레트 테일러 페이스북 최고기술책임자(CTO)는 “인터넷 사진 공유 상품들 중 가장 기능이 적은 게 우리 서비스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사진을 올릴 때 ‘태그’를 걸어 누구와 함께인지 적을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사진 자체보다는 내가 관심 가는 사람의 사진을 보고 싶어한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는 저커버그가 만든 모든 프로젝트의 근간을 이룬다.

 그의 어머니는 “저커버그의 감수성은 아마도 누이 3명과 함께 자라면서 길러진 듯하다”고 말했다. 하루는 여동생을 30초 안에 불러올 수 있는지를 두고 누나와 내기를 했다. 실제로 불과 몇 초 뒤 동생이 ‘오빠!’를 외치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커넷을 이용해 동생 컴퓨터에 ‘이 컴퓨터는 30초 후면 폭발한다’는 메시지를 띄운 것이다.

하버드에서 사랑을 만나다

 하버드대에서 그는 기업가의 꿈을 키웠고 사랑을 얻었다. 2학년 어느 금요일 저녁 열린 파티에서 지금의 부인 프리실라 챈(27)을 만났다. 화장실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우연히 대화를 나눴는데, 말이 통했다. 챈은 저커버그에 대한 첫인상을 “전형적인 공붓벌레 스타일”로 기억했다.

 보스턴 인근에서 태어난 중국계 미국인인 챈은 전형적인 ‘엄친딸’이다. 고교 졸업 때는 졸업생 대표로 고별사를 했고, 하버드대에 진학해 생물학을 전공했다. 이달 캘리포니아대 의대를 졸업하고 소아과 의사가 됐다. 학부와 의대 사이 2년간 초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그는 페이스북에 교사 일을 “어린이들과 어울리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해 주려 노력하는 일”이라고 적었다. 챈의 페이스북에 따르면 영어와 광둥어·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요리와 음식 전문채널 푸드네트워크 보는 것을 즐긴다. 또 ‘따뜻한 곳과 말린 토마토를 좋아하는 단순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저커버그는 챈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챈의 권유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 여행도 자주 다녀왔다. 주말이면 외식을 하는데, 주로 아시아 음식을 먹는다. 페이스북이 최근 선보인 장기 기증 프로그램도 챈의 영향이다. 저커버그는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어린이 환자들에게 장기 기증자가 나타난 날이면, 집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무척 밝았다”고 말했다. 저커버그가 뉴저지주 교육 개혁을 위해 1억 달러를 기부한 것도 교사 출신 챈의 영향이라는 분석이다. 한 언론은 “챈은 저커버그가 더 나은 남자가 되도록 하는 여자”라고 묘사했다.

 챈도 바쁜 남자친구와 진지한 관계를 이어 나가는 데 고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저커버그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오기 전 엄격한 데이트 규칙을 만들고 저커버그가 사인하도록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계약’의 세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알려졌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데이트할 것. 둘만의 시간을 최소한 100분은 가질 것. 그의 아파트는 안 되고, 페이스북 사무실은 더더욱 안 됨.”

챈과 저커버그는 닮은 부분이 많다. 미국 동부에서 태어나 자랐고, 고전 문학과 스포츠를 즐겼다. 저커버그는 고교 때 고대 로마 시인 버질이 쓴 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라틴어로 읽었고, 호머의 『오디세이』 등에 심취했다.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네이스』 중 좋아하는 구절로 ‘하늘은 담대한 자의 편이다’와 ‘한계가 없는 제국’을 들었다. 챈도 고교 시절 셰익스피어와 플라톤, 단테를 섭렵했다.

 저커버그는 고교 펜싱팀 주장을 맡았고, 챈은 테니스팀 선수였다. 챈은 교내 ‘로봇공학’ 팀에서도 활약했다. 25일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은 챈이 고교 시절 ‘학년 대표 천재’로 뽑힌 사진을 입수해 게재하며 “저커버그 못지않은 비상한 천재”라고 보도했다.

프로그래머에서 기업가로

 저커버그는 단순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코스 매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듣고 싶은 강의를 고를 때 다른 학생들의 선택을 참고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이어 만든 ‘페이스 매시’는 두 사람씩 사진을 띄워 누구와 더 데이트를 하고 싶은지 고르는 프로그램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폭발이었다. 학교 서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고, 사진을 무단으로 게재한 데 대해 학생들의 불만이 쌓이자 학교가 이를 폐쇄했다.

 때마침 상급생 3명이 네트워크 사이트 ‘하버드 커넥션’ 작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프로젝트에 합류해 돕다가 저커버그는 따로 나와 독자적으로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렇게 2004년 페이스북이 탄생했다. 당시 이와 비슷한 서비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탠퍼드대와 예일대 교내에도 네트워크 사이트가 있었다. 대학 밖에는 마이스페이스와 프랜드스터라는 사이트가 이미 수백만 명의 회원도 갖고 있었다. 경쟁자들을 제친 비결이 바로 그의 경영능력과 기업가 본능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는 세련되면서 사용하기 쉬운 서비스를 만들 줄 알았다. 트래픽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서비스 대상을 순차적으로 넓혀 나갔다. 사용법이 복잡하거나 서버가 느린 사이트들이 외면받을 때, 페이스북이 그 사용자들을 흡수했다. 초기에 ‘내가 사장이다, 불만이냐(I’m a CEO, bitch)’라고 쓴 명함을 들고 다니던 철없는 청년은 기업가로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올 2월 미래 주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해커 정신’을 강조했다. 창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빠른 의사결정에 대해 보상하는 문화를 말한다. 이를 위해 다섯 가지 경영방침도 내놨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하라 ▶더 많은 것을 만들고 배울 수 있도록 재빠르게 움직여라 ▶아무 위험도 지지 않는 게 가장 위험하다. 때로는 틀리더라도 담대하게 결정하라 ▶열린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다 ▶사회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라.

돈 보기를 돌같이(?)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서비스를 만드는 게 아니다. 더 나은 서비스를 하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다.” 미래 주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또 강조한 부분이다. 챈은 “몇 년 전 야후가 거액을 제시하며 인수 제안을 했을 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고민스럽고 스트레스가 컸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결국 이 커플은 “우리 목표와 우리가 믿는 것들, 살면서 즐기는 소소하며 단순한 것들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자”고 결론짓고 야후의 제안을 거절했다. 인수 제안을 했다 거절당한 테리 세멜 전 야후 CEO는 “수십억 달러를 거절하는 사람, 특히 그 나이에 마다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돈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거의 병적”이라는 표현도 쓴다. 그는 수도승 같은 단순한 삶을 사는 것으로 알려졌다. 채식을 주로 하며, 공원 산책을 즐긴다. 지난해까지 그는 혼다 중형차 아큐라와 미국 쉐보레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다녔다. 지난해 700만 달러를 치른 팰로앨토저택이 가장 값나가는 재산이다. 최근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추산한 그의 재산가치는 191억 달러(약 22조4100억원). 상장 이후 주가가 연일 하락하고 있어 평가액의 변동이 크지만 최연소 억만장자라는 타이틀은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저커버그는 2010년 12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이끄는 고액 기부 캠페인에 동참했다. 일생 동안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며 “보통 인생의 후반부에 가서야 기부를 생각하지만, 굳이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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