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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전 조선에도 잡스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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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 사진 수원문화재단 제공

‘인문학과 기술’ 융합해 화성 설계

28살에 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희릉직장’이란 벼슬에 임함으로써 11년간의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희릉은 조선 초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며, 직장이란 종7품으로 유적 관리소장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능의 관리란 주로 조경이나 토목 분야의 기술적인 일이었으니, 첫 직책부터 계획가이자 기술자로 활약해야 할 그의 운명을 보여주었다.

그가 관계에서 최초로 두각을 나타낸 업적도 계획과 기술 분야였다. 그해 겨울, 정조의 명으로 서울 노량진에 배다리를 설계하게 되었고,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는 훌륭한 건축이란 구조적으로 튼튼하고, 기능적으로 편리하며, 미학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론은 세계적으로 건축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는데, 정약용의 배다리는 그 3대 기준을 모두 통과했다. 고대 로마의 건축은 단지 집짓는 것만 아니라 다리를 놓는 토목술까지 포괄한 광범위한 기술이었다. 정약용은 데뷔 작품부터 건축의 정의와 가치를 훌륭하게 구현한 셈이다.

아직 하급 관리인 홍문관 수찬이던 31살 때, 정조는 정약용을 불러 수원 화성(사진)의 설계를 맡기게 된다. 화성 건설 사업은 정조의 개혁 정책을 집대성한 완결판이었고, 국력을 집중해야 할 대규모 사업이었다. 의욕만큼 정치적·경제적 부담이 막대한 사업이었기에, 지위 고하를 떠나서 능력과 충심에서 가장 믿을 만한 정약용에게 맡긴 것이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을 받은 지 1년 만에 성곽의 기본 설계와 축조 방법을 창의적으로 집대성한 <성설>을 정조에게 바쳤고, 이 결과를 매우 흡족해한 정조는 <어제성화주략>이라 제목을 바꾸어 정조 자신의 작품으로 둔갑시킨 채, 어명으로 반포하여 화성 건설의 지침으로 삼았다. 지금 같으면 대리 집필로 언론 비판의 표적이 되든가, 군신 간의 표절 시비로 소송감이 되었겠지만, 왕조시대의 관행으로는 오히려 최상의 찬사요 영광이었다.

건축서적 탐독에 그치지 않고
철저한 현장조사뒤 연구 거듭
기존 성곽과 전혀다른 성 설계

성곽 축조에 관한 이론인 <성설>은 모두 8개조로 이루어졌다. 성곽의 크기 정하기, 성벽의 재료, 성벽 쌓기와 해자 파기, 기초 쌓기, 석재 마련, 운송로 닦기, 수레 만들기, 성벽 쌓는 기술 등 계획부터 완공까지 중요한 공정들을 모두 다루었다.

성곽의 크기는 1보(약 1.18m)를 기준으로 전체 길이 3600보(4.24㎞)로 계획했다. 1보는 1기의 수레를 배치하여 석재를 옮겨 쌓을 수 있는 적정 단위로서, 총 3600기의 수레가 필요하여 시공 물량 계산에도 용이한 단위이다. 성곽의 재료는 생산하기 어려운 벽돌이나 내구성이 약한 흙을 피하고, 익숙하고 견고한 돌을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석재도 대·중·소의 크기로 규격화하여 운반과 축성이 쉽도록 하였다.

정약용은 성곽을 쌓는 작업보다 석재를 공급하고 운반하는 사전 작업을 더 중요시했다. 재료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으면 현장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원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기존 성곽 공사에서 재료가 불규칙하여 쌓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었고, 운송로를 확보하지 않아 운송에 많은 차질이 있었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였다. 석재 산지부터 현장까지 미리 도로를 정비하고, 유형거라는 새로운 수레를 고안하여 운송에 사용하는 놀라울 정도의 계획성이 돋보였다.

석성은 견고하기는 하지만, 돌의 자체 무게를 못 견뎌서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아래 부분은 들여쌓고, 위로 갈수록 수직으로 쌓는 이른바 ‘규(圭)형’ 공법을 제안했다. 규형이란 첨성대의 곡선을 연상하면 되는데, 실제 이 형태로 화성 곳곳을 쌓아 견고함을 유지했다.

당시 관급공사의 임금 지급 방법은 일당제가 일반적이었는데, 전국에서 모집한 일꾼들은 체계적인 관리 감독이 어렵기 때문에 획일적인 일당 지급은 품질을 저하시키고 재정을 낭비할 우려가 컸다. 정약용은 인부 한 사람이 옮기고 쌓은 실적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일종의 성과급제를 제안하여 비용을 절약하고 공정도 단축하도록 했다. 그 결과, 50개월 이상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34개월로 앞당길 수 있었다.

아울러 중요한 시설들의 그림까지 그려 해설한 6편의 <도설>을 바쳤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이중성인 옹성, 대포를 장착할 포루, 성 밖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현안, 성문의 불을 끌 수 있는 누조 등 새로운 시설들을 설계하여 자세한 그림과 글로 그 원리를 밝혔다. 또한 무거운 돌을 적은 힘으로 들 수 있는 거중기 등도 도설에 기록해 바쳤다. 옹성이나 포루, 현안, 누조 등은 조선의 성곽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시설들이었으나, 방어용 성곽에는 필수적인 요소들이었다. 정조는 당시 중국의 최신 발명품들을 집대성한 <기기도설>을 하사했는데, 정약용은 이 책에 소개된 기중기의 원리를 응용하여 중국의 것보다 4배나 효율적인 거중기를 발명하여 실제 공사에 사용했다.

아무리 훌륭한 선진 제도라도
우리 현실 안맞으면 수용 거부
인문적 건축가란 뭔지 질문 던져

정약용은 건축이나 토목과 같은 기술교육을 받은 적이 결코 없었다. 그 역시 동시대 여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삼경>을 읽고, 시서예의 훈련을 받은 서생이었다. 박지원·이덕무 등 선배로부터 실학을 전수받은 점이 조금 다르지만, 선배들의 실학 역시 인문학적 지식이었지, 과학기술적 지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배다리 설계나 성곽 설계를 정약용은 어떻게 수행할 수 있었을까?

그는 철저한 인문주의자였다. 조선과 중국의 성곽 제도를 연구했고, 공사와 관련된 수많은 서적과 자료들을 분석했다. 윤경의 <보약>이나 류성룡의 <성설>을 수용하여 화성을 산성과 같이 견고한 방어시설로 계획했다. 또한 중국의 관련 서적들인 <무비지>, <무편>, <기기도설> 등 병서와 기술서들을 섭렵하여 온갖 새로운 시설과 기구들을 발명하고 적용했다. 그가 단순히 과거의 경험을 답습하는 기술자의 수준에 머물렀다면 새로운 성곽은 구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론에만 매달리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기존 성곽들에 대한 조사와 현장 답사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했다. 또한 당시 조선의 기술수준을 정확히 인식하여 가능한 방안들을 강구했다. 예를 들어, 절친한 북학파의 ‘벽돌생산론’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고, “우리나라는 땔나무도 귀하고 벽돌 굽는 방법을 알지 못하니 거론할 바가 못 된다”고 비판했다. 아무리 선진 중국의 제도가 좋다고 해도 현실에 맞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다는 실용적 비판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찍이 <기예론>에서 인간은 짐승과 달리, 지혜로운 생각과 교묘한 연구 능력이 있어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지식과 기술은 끊임없이 계승하고 선진 외국의 성과를 받아들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에 바탕을 둔 기술을 개발하고, 실천적 목표를 위한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이론적, 인문적·개방적·실천적 태도가 화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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