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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수양대군의 또다른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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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부부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의 친동생 금성대군이 수양대군 제거를 도모하다 귀양을 가게 되는데 금성이 유배를 간 곳이 순흥부(지금의 경북 영주)입니다.

금성을 감시할 책임을 맡은 순흥부사 이보흠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안평대군 및 금성대군에 동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금성을 대역죄인으로 박대하지 않고 종종 금성이 감금된 집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반수양 감정을 공유하게 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점점 많은 지역유지와 선비들이 모여듭니다.

마침내 금성은 이보흠을 설득해 자신의 가동들을 비롯해 2000~3000명 정도의 군사를 일으켜 안동까지 접수하고 영남의 선비와 관리들을 규합, 한양으로 쳐들어가 수양대군을 폐위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이 제2차 단종복위운동으로 사육신들이 죽음을 당한지 1년이 지난 1457년의 일입니다.

그런데 금성을 모시던 궁녀와 이보흠 밑에서 일하던 관노가 서로 눈이 맞아 자기 상전들의 음모를 고변하면 잘 먹고 잘 살수 있을거란 생각을 품고 몰래 금성대군이 쓴 격문을 훔쳐 한양으로 도주합니다.

관노가 도망치자 격노한 이보흠은 각지의 수령들에게 영을 내려 빨리 이들을 잡도록 재촉하고 풍기현감이 이들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사로잡힌 궁녀와 관노의 몸수색을 하던 현감은 이들이 지닌 격문을 보고 놀라 두 사람의 목을 베고 바로 한양으로 달려가 수양대군에게 격문을 바칩니다.

수양은 이보흠을 체포하고 순흥부 일대에서 대량학살을 저지릅니다.

주모자 21명을 비롯해 300여명의 영남 양반들이 처형당했고 순흥부 한 곳에서도 순흥 안씨 중심으로 무려 700여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순흥 안씨들은 모두 강원도 원주 일대로 도주했으며 순흥부는 폐지되고 군현으로 격하됩니다. 계유정난으로 죽은 이가 107명, 사육신사건으로 처형된 이가 70명 정도인 것을 알면 엄청난 학살이었죠.

금성대군은 온몸이 꽁꽁 묶인채 돌우물 안에 갖혀있다 음력 10월 21일 안동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으며 이보흠은 10월 27일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사육신에 이어 송현수, 금성대군의 역모를 보고 온갖 반수양 음모의 중심에 단종이 있다고 생각한 수양대군은 강원도 영월에 귀양간 단종에게 사약을 내려 죽입니다.

사육신, 금성대군, 이보흠 등은 사건이 있은지 230여년이 지난 숙종대에 신원되어 단종의 사당에 같이 배향되고 충신으로 역사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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