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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 뉴튼을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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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 뉴튼을 기억하다.


DESIGN

Remembering the Apple Newton’s Prophetic Failure and Lasting Impact

By MAT HONAN 08.05.13 | 6:30 AM


The original Apple Newton MessagePad. Photo: Ariel Zambelich/WIRED

세간의 주목을 받다가 죽음을 당한 제품의 이야기는, 성공한 제품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때가 종종 있다. Kin과 HP TouchPad, Edsel 모두 여러가지 이유로 실패했지만 흥미를 돋구는 실례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품들 중에서도 애플 뉴튼 메시지패드에 비할 제품은 없다. 뉴튼은 살해당했을 뿐 아니라, 그 방법도 폭력적이었다. 기술 업계의 위대한 사나이가 아직 어린 그 제품의 머리카락을 잡아 당겨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뉴튼은 지금도 주목할 만한 제품이며, 그 영향력 일부는 지금도 남아 있다. 여러분의 태블릿, 뉴튼은 데스크톱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 시키기 위해 디자인 된 첫 컴퓨터였다.

Birth of an Idea

뉴튼에 대한 아이디어가 탄생한 곳은 비행기 안이었다. 마이클 차오(Michael Tchao)가 1991년 초, 당시 애플 CEO였던 존 스컬리(John Sculley)에게 뉴튼에 대한 아이디어를 비행기 안에서 설득했었고, 애플은 이듬해 뉴튼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20년 전인 1993년 8월, 메시지패드 100의 판매를 시작했다. 뉴튼은 애플의 휴대용(handheld) PDA(애플이 만든 조어이다)로서,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기본적이었다. 노트를 적고 연락처를 저장하며, 일정을 관리하면서 팩스를 보낼 때도 사용할 수 잇었다. 스타일러스 펜이 있었고, 심지어 필기인식 기능도 들어 있었다. 어느 정도껏이긴 했지만 말이다. 당시 뉴튼은 상당한 야망이 들어 있었다. 손으로 들고 다니는 컴퓨터를 여전히 과학소설의 산물로 여기던 때였기 때문이다.

뉴튼 사용자 인터페이스 및 소프트웨어 개발 책임자였던 스티브 캡스(Steve Capps)는 뉴튼의 꿈을 실현 시킨 인물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새로운 범주의 휴대기기를 디자인하고, 그에 기반한 플랫폼을 구축하자가 목표였습니다. 배터리 수명 때문에 생긴 한계로, 새로운 아키텍처가 필요했죠." 즉, 애플은 뉴튼이라는 새로운 기기만 만들려 하지 않았다. 아예 완전히 새로운 컴퓨팅을 발명하기 원했었다. 주머니에 들어가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컴퓨터로서, 사실 주머니야말로 핵심적인 디자인 필수 사항이었다.

마이클 차오가 스컬리에게 뉴튼을 처음 제안했을 때 요구 사항이 몇 가지 있었다. 펜과 삐삐 주파수 상에서 작동하는 라디오, 맥이나 PC에서 디자인할 수 있는 폼과 탬플릿, 그리고 PC를 위한 “자연스러운(seamless)" 입력 기기로서 작동해야 한다는 사항이었다. 뉴튼 기기 디자인 팀을 운영했던 아이베스터(Gavin Ivester)에 따르면, 스컬리가 한 가지 핵심 기능을 한 가지 추가 시켰다. 크기였다. “제일 우선적인 요구사항은 존 스컬리의 주머니 안에 들어가야 한다였습니다. 그래서 너비에 집중했죠. 들고 있기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손가락으로 한 쪽 면을 들고 엄지 손가락으로는 다른 쪽 면을 만져야 했습니다.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죠. 손바닥을 뒤집어도 들고 있을 수 있어야 안전감을 느끼니까요.

당시 컴퓨터 제조업체들은 개별 부품을 만들기가 대단히 어려웠었다. 즉 PC 보드상의 모든 것은 각도가 맞아야 했다. 그래서 뉴튼 팀은 어둡고 매끈하고 조각된 미감을 주는, 이른바 “배트맨 컨셉"이라는 디자인을 구현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뉴튼 디자인은 또한 그동안 애플을 지배해 오던 백설공주(Snow White) 디자인 언어에서 실질적으로 처음 벗어난 디자인이었다. 백설공주는 프로그 디자인(Frog Design)에서 만들었으며 1980년대 애플 제품을 규정한 디자인 언어였다. 넥스트와 협조한다며 프로그 디자인을 해고했던 애플은 제품 외양을 다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매끈한 검정색의 소형 본체에 부품 모두를 밀어 넣기는 역시 어려웠다.

아이베스터의 말이다. “스컬리 집에 몰래 들어가서 주머니를 커다랗게 바꿔 놓자고 농담하곤 했어요."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손바닥 크기의 휴대용 컴퓨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1992년, 그들은 CES에서 뉴튼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었다.

A Sudden Death



그 결과는 완전히 새로운 범주의 기기로서, 완전히 새로운 아키텍처에다가 완전히 새롭고 과감한 디자인 언어를 표현했다. 필기인식이라는 딱 한 가지 문제만 빼고 말이다. 캡스는 한탄했다. “우리는 그저 기술을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93년 제품을 출하하기 시작했을 때 기능이 거의 안 돌아갔었죠." 필기인식은 뉴튼의 핵심적인 팔리는 사항이었으나, 아마 뉴튼을 죽이고 만 핵심 기능이기도 했다. 뉴튼의 문자 인식 문제는 특히 둔즈베리(Doonesbury) 만화에서 농담거리가 됐다.

작가인 트루도(Garry Trudeau)는 1주일 내내 뉴튼의 필기인식 기능을 소재로 삼아 만화를 연재했다. 그러나 실상 뉴튼과는 관계가 없는 소재이기도 했다. 트루도는 나중에 애플 팀에게 뉴튼 놀리기 만화를 연재할 당시 뉴튼을 써 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저 장난감을 갖고 노는 소년들을 풍자하고 싶었으며, $5 짜리 공책에 대한 완벽한 대체제로 $700 짜리 컴퓨터가 나왔다는 풍자처럼, 이미 악평이 자자했던 뉴튼의 필기인식 기능은 쉬운 상대였다.

아무튼 풍자는 효과적이었다. 둔즈베리 만화 속에서, “Catching on?"를 뉴튼은 “egg freckles"로 인식했다. 이 대목은 뉴튼에 대한 속기법 농담이 됐다. (나중에 스티브 캡스는 둔즈베리 만화를 라이선스하여 메시지패드 200에 있는 뉴튼 소프트웨어 2.0의 이스터에그로서 “egg freckles"를 집어 넣는다.) 뉴튼에 인생을 걸었던 팀들에게는 큰 타격이어서, 그들은 결국 필기인식 기능을 제대로 구현해내기는 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아이베스터의 말이다. “문자 인식은 오류가 사라졌고 정말 뛰어났습니다만, 한 번 웃음 거리가 되어버리자, 두 번 다시들 안 보시더군요."

둔즈베리 만화만큼이나 뉴튼의 이미지에 타격을 준 존재는 또 있었다. 개리 트루도보다도 훨씬 더 거대한 적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뉴튼을 증오했기 때문이다. 월터 아이작슨의 잡스 전기에 따르면 잡스는 뉴튼의 형편 없는 성능때문에(그리고 스컬리의 발명품이었기 때문에) 뉴튼에 분노했고, 뉴튼의 입력 장치를 조롱했다. 그는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스타일러스 10개를 주었습니다. 그러니 또 하나 만들지는 맙시다."

그리고 마침내 잡스가 애플에 돌아와 실권을 쥐자 그는 뉴튼을 침몰 시켰다. 아이작슨에게 잡스가 한 설명이다.

만약 애플의 상태가 덜 위험했더라면, 아마 저 스스로 나서서 뉴튼을 어떻게 제대로 만들지 고민했을 겁니다. 뉴튼 사람들을 믿지 않았거든요. 본능적으로 정말 좋은 기술이기는 하지만 관리의 문제 때문에 망했다고 느꼈습니다. 뉴튼을 없애면서 새로운 휴대기기에 좋은 엔지니어를 돌릴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이주했을 때 결국 우리가 옳았었죠.

스티브 캡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애플에는 프로젝트가 너무 많았습니다. 잡스가 뉴튼을 보고는 ‘이걸로 뭘 할 수가 없다'고 말했겠죠."


Internally, the sleek black design of the MessagePad 100 was referred to as the Batman concept. Photo: Ariel Zambelich/WIRED

The Lasting Legacy

상대적으로 짧았던 수명에도 불구하고 뉴튼과 뉴튼의 방식은 지금도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지금도 뉴튼을 사용하는 취미가들이 있으며, 뉴튼 전용 박물관도 있다. 게다가 뉴튼은 오늘날 여러분이 사용하는 기기에도 존재하고 있다.

적어도 한 가지는, 여러분이 매일 사용하는(실제로는 모든 모바일 업계를 움직이는) 뉴튼의 유물이 있다. 바로 ARM 프로세서다. 배터리 수명을 최대로 늘리기 위해 뉴튼 팀은 와트당 MIPS가 높은 프로세서를 사냥중이었고, 제일 좋은 후보가 ARM이었다. 애플은 당시 ARM 지분 1/3을 소유했고, 뉴튼 안에 들어갔던 ARM6 프로세서의 개발을 지휘했다. 뉴튼이 없었다면 ARM 기술은 결실을 못 맺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뉴튼이 준 실질적인 충격은 따로 있다. 컴퓨터를 사무실에서 바깥으로 꺼냈다는 점이다. 오늘날 PDA는 우리와 항상 함께 있다. 스타일러스가 아닌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키보드가 대부분의 경우 텍스트 입력에 훨씬 더 빠르고 효율적이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폰의 전체 컨셉은 PDA와 카메라, MP3 플레이어, 그리고 휴대폰을 담고 있다. 시리와 구글 음성 검색도 있다. 지적인 비서의 개념으로 자연 언어를 알아듣고 결과를 실행하는 것은 정말 강력하지만, 이 또한 뉴튼이 개척했던 최대의 강점 중 하나였다. “내일 정오에 존과 오찬 모임"이라 적으면 실제로 일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뉴튼 프로젝트는 확실히 실패였지만, 그 충격은 지금도 우리 일상에 살아 있다.

1. Correction 10:40 EST 08/05/2013 The first Newton model was the MessagePad
2. Correction 14:45 EST 08/06/2013 The Easter egg features a new Doonesbury cartoon concealed in the Newton’s second operating system.
3. Correction 14:45 EST 08/06/2013 The proper measurement is millions of instructions per second.

Remembering the Apple Newton's Prophetic Failure and Lasting Impact | Wired Design | Wir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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