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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태블릿은 실패했는데 아이패드는 어째서 성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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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태블릿은 실패했는데 아이패드는 어째서 성공했을까?

OPINION

How Steve Jobs Made the iPad Succeed When All Other Tablets Failed

By FRED VOGELSTEIN 11.02.13 | 6:30 AM


Photo: Jon Snyder / WIRED

구글의 모든 곳에 안드로이드 전략에 대한 스티브 잡스의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과감했다.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7년 전, 월스트리트저널의 월트 모스버그(Walt Mossberg)에게 "사람들은 키보드를 원하더군요... 태블릿을 보면, 그거 앞으로 실패할 거라고 봅니다."라 말한 바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잡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블릿을 선보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태블릿을 분명 다시 생각했었다. 구글이 모바일-플랫폼 전쟁을 횡적으로 개시하려 한다면, 잡스는 종적으로 승리할 참이었다. 당시 안드로이드 수장이었던 앤디 루빈은 안드로이드를 최대한 확대 시키려 했다. 마치 윈도와 빌 게이츠처럼 더 많은 머신에 안드로이드를 붙이자였다. 안드로이드 플랫폼이 성장하는 한, 루빈은 어느 제품이 히트를 치든 별 상관 없었다. 애플의 전략을 위해 잡스로서는 iOS를 수직적으로 성장 시켜야 했다. 즉, 매번 장외 홈런을 쳐야 했다는 이야기다.

애플 내외 간부진들은 잡스가 과연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자기 플랫폼을 너무 융통성 없게 다스려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졌던 지난날의 실수 말이다. 이번에도 잡스는 융통성 없게 대처하고 있었다. 2010년 초, 잡스는 아예 더 많은 애플 제품이 특수 스크류만으로 열 수 있게 해 놓았다.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리콘 밸리 내부 관측통은 이러한 상징을 크게 간주했다. 소비자에 대한 안드로이드의 강점 중 하나가,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융통성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아이폰보다 안드로이드를 더 많아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아이폰을 가진 이들은 아이패드와 아이포드 터치, 그 외 같은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다른 애플 제품들도 가질 것이어서 동일한 온라인 스토어에 들어가고, 관여자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을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잡스만한 자신감 정도는 돼야 그렇게 기준을 높게 잡을 배포를 가졌다 할 수 있겠다.

Is There Room for a Third Category?

2010년 1월 27일, 아이패드를 선보였을 때, 잡스는 애플을 한참 앞서게 했음을 분명하게 한 모습이었다. 세상을 위해 새로이 한 발명품을 두고, 그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는 듯, 평상시보다 좀 느리게 아이패드를 선보였다. 그는 맥북 노트북과 아이폰 사진 슬라이드를 놓은 다음, 그 사이에 물음표를 붙이고는, 간단한 질문을 했다. "중간에 세 번째 카테고리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요?"

당시 잡스는 이 질문에 대해 누구나 내놓을 답변부터 했다. "넷북이라는 사람들이 있죠. 문제는 넷북이 어느 면으로 봐도 좋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넷북은 느리고 저질의 화면에 성능도 투박하게 돌아가며, 옛날 PC 소프트웨어[윈도]를 돌립니다. 어느 노트북보다 잘 돌아가지도 않아요. 쌀 뿐이죠."

아이패드에 대한 잡스의 논거는 직관적이었다. 집필이라든가 프레젠테이션, 스프레드시트로 하는 재무 분석과 같은 무거운 사무 작업용으로 노트북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이메일과 텍스트, 트위터, 링크트인, 페이스북으로 통신하거나, 인터넷 브라우징, 책과 영화, 드라마, 음악, 사진, 게임, 비디오 등 미디어 소비용으로 살 뿐이다. 잡스는 아이폰에서도 이 모두를 할 수 있지만 화면이 너무 작아서 편안하지가 않다고 언급했다. 물론 노트북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키보드와 트랙패드가 너무 거추장스럽고 배터리 수명이 너무 짧아서 어댑터도 갖고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둘 모두의 최고를 조합한, 중간 종류에 들어갈 기기가 바로 세상이 원하는 것이었다. 잡스 말마따나 "노트북보다는 친밀하되, 스마트폰보다는 더 다재다능한 기기"였다.

말을 더 한 뒤, 잡스는 곧바로 세상이 무엇을 기다려 왔는지 밝혔다. "우리에게 답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맥북과 아이폰 슬라이드 사이에 아이패드가 멋지게 착륙했다.

In a Long Line of Tablets, How Did the iPad Succeed Where Others Failed?

사람들이 넋이 나가 한 부분은 아이패드의 외양이 아니었다. 정작 사람들은, 세계 최대의 훌륭한 기업가가 행여나 실수를 저지른 것이 아닐까 궁금해했다.

태블릿 컴퓨터는 소비자 가전 업계에서 제일 불신 받는 종류의 제품군이었다. 여러 기업들이 PC의 탄생 이후로 태블릿 컴퓨터를 시도했었고, 워낙 많이 시도해서 태블릿은 안 된다는 관념이 생겨날 정도였다.

우주 프로그램에 있어서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만큼 긱인 제록스 PARC의 앨런 케이(Alan Kay)는 1968년, 다이너북(Dynabook) 계획을 거론하면서 "A Personal Computer for Children of All Ages"라는 제목의 논문을 1972년에 작성했다. 그 논문에도 태블릿 계획이 나와 있었다. 애플은 1983년 Bashful이라 부르는 프로토타입을 만든 바 있으나 제품으로 출시하지는 않았다. 소비자의 관심을 받은 최초의 태블릿은 아무래도 1990년대 후반에 나온 PalmPilot의 장본인, 제프 호킨스(Jeff Hawkins)로부터 나왔다. 1989년 Tandy에서 나온 GRiDPad이다. 태블릿 컴퓨팅의 그 다음 쓰레기는 1993년 GO Corp.의 EO였다. (GO Corp.의 초기 직원 중, 구글 최초의 사업부 간부에 오르는 코데스타니(Omid Kordestani)와 1980년대 애플 마케팅부 부사장이었던 빌 캠벨(Bill Campbell)도 있었다.)

1994년 애플은 뉴튼을 선보였다. 충격적인 PDA였던 뉴튼은 실리콘 밸리의 실패작으로 판명났고, 역시 태블릿은 안 팔린다는 의식을 더 단단히 만들 뿐이었다. 게다가 뉴튼은 잡스 없는 애플의 상징이 됐다. 당시 애플은 부도 직전까지 가면서 실패한 CEO들이 연이어 다스리고 있었다. 결국 뉴튼은 잡스가 돌아온 이후, 1997년에 단종 시킨 프로젝트가 됐다. 그때까지 휴대용 컴퓨터를 원한다면 노트북을 사야 했었다. 다른 모든 기능은 너무 많은 타협을 필요로 했다.

실제로, PalmPilot과 유사 기기는 그 다음 5년 정도 인기를 많이 끌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많은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노력은 2002년,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였다. 비록 태블릿 PC가 실제로 팔리기는 했지만 당시 태블릿 PC는 아마존 킨들이 시장에 나온 유일한 태블릿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태블릿 PC는 태블릿이라 할 수 없었다. 책과 신문, 잡지를 다운로드하여 흑백 화면에서 읽을 수는 있었지만 태블릿 PC의 태블릿스러운 기능은 그것 뿐이었다.

이 모든 이력이 잡스로서도 부담이었다. 특히나 구글이 지금 그의 목을 죄어 오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태블릿 진출이 너무 위험하지 않냐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잡스는 태블릿이 다룸직한 완벽한 프로젝트라 여겼다. 이미 그는 개인용 컴퓨터와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 휴대폰을 다시 상상한 바 있었다. 그리고 태블릿도 아이패드로 다시 상상해냈다. 아이패드는 노트북 기능 대부분을 해냈다. 추가적으로 무게는 1/4 수준이고 배터리 수명은 세 배였으며, 아이폰과 같은 터치 화면이었다. 부팅도 필요 없었고 언제나 인터넷에 연결돼 있었다.

게다가 아이폰과 거의 동일한 소프트웨어(앱도 추가다)를 사용했기에 별도의 학습 필요도 없었다.

기술적으로, 아이패드는 아이폰과 작동 방식이 같았지만 사용자 기대감의 차이는 거대했다. 휴대폰은 언제나 주머니 크기 디자인이었고,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아이패드와 같은 화면은 원래 노트북 화면 크기로서, 스타일러스나 트랙패드/마우스, 키보드가 필요했었다. 애플이 내보낸 영상을 보면, 애플의 전임 iOS 소프트웨어 책임자였던 스콧 포스탈이 하는 말이 나온다. "뭔가 보신다면 다가가서 만져 보시겠죠. 완전히 자연스럽습니다. 생각하면서 만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만지죠."

아이패드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환호로 가득 차 있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아이패드를 들고 있는 잡스에게 성스러운 옷을 입힌 그림을 표지에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제목도, "잡스기(記), 희망과 선전, 그리고 애플의 아이패드"였다.

But Why Were People So Skeptical at First?

매킨토시의 아버지로서 잡스는 PC를 다시 상상하거나 전통적인 태블릿에 대한 관념에 도전하는 분야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잡스의 한 절친의 말이다. "매킨토시가 곧바로 주류가 되지 못 한 사실을 스티브가 정말 싫어 했었어요. 모두들 매킨토시 사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아이패드를 곧바로 시선 끌게 할지 아주 많이 의논했었어요."

하지만 아이패드에 대한 반응은 며칠, 그리고 몇 주가 지나도 미지근했다. 아이패드에 카메라가 없다거나, 멀티태스킹이 없고, 생리대 이름같다는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아이패드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게다가 아이패드는 아이폰보다 딱 4배 더 클 뿐이었다.

구글의 에릭 슈미트와 같은 경쟁자들은 아이패드를 헐뜯는 발언을 했다. 물론 "경쟁사 제품에 대해서는 코멘트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인 다음, 슈미트는 "커다란 폰과 태블릿의 차이 좀 말씀해 주시죠."라 말했고, 게이츠는 "저는 목소리와 펜, 실질적인 키보드의 조합이 주류가 되리라 지금도 생각합니다. 아이패드는 멋진 리더기이지만 제가 보고 나서 '와, 마이크로소프트가 했어야 하는데'라 할 만한 부분이 전혀 없더군요."라 말했다.

그러나 제일 큰 비판은 프레젠테이션에서 잡스가 답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내게 아이패드가 필요할까?

회의적인 대중 반응이야말로 간단한 설명이었다. 아이패드와 같은 기기를 본 적이 없었고, 그나마 판매도 두 달을 기다려야 했었다. 소비자들은 본응적으로 휴대폰과 노트북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들이 봤던 태블릿은 그들이 원치 않는 태블릿 뿐이었다.

애플에서 아이패드 작업을 했던 이들도 처음에는 아이패드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전직 애플 엔지니어로서 소프트웨어 작업을 한 와일드(Jeremy Wyld)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봤을 때를 기억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데 처음에는 쓸데 없는 짓이라 생각했어요. '웃기다'는 생각이었죠." 그냥 투덜대는 말이 아니었다. 와일드는 1990년대 뉴튼 작업을 했던 초기 엔지니어이기도 했었다. 그 다음 그는 애플을 떠나 Excite와 Pixo로 갔었다.

그가 첫 아이패드를 쳐다 봤을 때, 와일드가 생각했던 것은 주머니에 안 들어가는 더 큰 아이폰이었다. "크게만 만들었다면 별로들 안 좋아하리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즉 과대해진 아이폰처럼 보이는 아이패드였다. 같은 소프트웨어에 터치스크린이었지만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노트북이었던 것이다.

아이패드를 가지려고 스마트폰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노트북은 분명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아이폰이라 비판할 수는 있었다. 아이패드는 더 큰 화면에 단순한 수정판에 불과했지만, 그점이야말로 아이패드를 새롭고 강력하게 만들어줬다.

2007년 아이폰용 페이스북 앱을 작성했고 2002년 파이어폭스 인터넷 브라우저를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조 휴이트(Joe Hewitt)가 보기에 화면 크기의 중요성은 너무나 명백했다. 아이패드가 첫 선을 보인 이튿날, 그는 900자 짜리 블로그 글을 적었다. 아이패드는 애플이 이제까지 한 것 중 가장 중요한 제품이라는 내용이었다. 1년 전, 휴이트는 애플의 제한적인 앱스토어 정책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여러가지 장비와 플랫폼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그는 아이패드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썼다.

"거대하고 복잡한 소셜네트워킹 웹사이트를 손에 들 수 있는 터치스크린용으로 줄이는 시도를 하는 데에만 1년 반이 걸렸다. 목표는 페이스북이라는 거대한 사이트의 모바일 버전을 만들자 뿐이었지만, 플랫폼에 익숙해지자, 웹사이트보다도 더 잘 작동하는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데스크톱에서 웹에 이르기까지 커리어상 개발했던 모든 플랫폼 중에서 아이폰 OS는 권한 부여에 있어서 제일 훌륭한 감각을 줬고, UI 디자인 예술 기준을 한껏 높였다. 다만 한 가지 한계만 빼면 말이다. 화면이 너무 작았다.

아이패드는 개발자들이 데스크톱과 웹 소프트웨어의 모든 면을 다시 상상하기 위한 정말 좋은 기회다… 요점은, 아이폰에서 귀여운 장난감이었던 앱 다수가 아이패드에서는 완전한 기능의 파워 툴이 된다는 사실이다. 아예 데스크톱/노트북을 잊게 한다. 그저 우리는 발명을 해야 할 뿐이다.”

Journey to the Center of the Mobile Universe


원래 나와야 했을 때보다 더 빠르게 개발된 아이폰과는 달리, 애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디자인 팀을 넘나들었던 아이패드의 개발 여정은 길었다. (아이작슨에게 잡스는 아이패드의 시작이 2002년이었다고 말했다.)

곤란하게도, 기술적으로 제일 어려워 보였던(가령 오늘날 모든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공통인 멀티터치 화면) 작업은 제일 멀리까지 나아갔고, 제일 단순해 보였던 작업(가령 멀티터치 외 나머지 만들기)은 빠르게 좌절을 안겨다 줬었다.


아이패드 프로젝트에서 멀티터치 작업을 이루낸 엔지니어 중 하나인 조쉬 스트리콘(Josh Strickon)의 MIT 석사 논문 주제가 대략적인(crude) 멀티터치 화면 만들기였다. 2003년까지 그는 여전히 애플에 있는 스티브 호텔링(Steve Hotelling) 및 브라이언 후피(Brian Huppi)와 함께 토니 퍼델(현재 Nest에 있다)에게 훨씬 개량된 멀티터치 기술을 보여줬다. 그들의 시연 덕택에 단순히 Q79 그룹으로만 알려졌던 멀티터치 팀은 애플 투자금 200만 달러를 유치할 수 있었다.

Q79 그룹은 손가락 입력에 반응하도록 하는 거대한 서킷 보드를 기기 안에 들어갈 단일 칩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때까지 서킷 보드는 2x2 제곱피트의 크기로 화면에 별도로 연결돼 있었다. 시연은 잘 이뤄졌으며, Q79 그룹은 가상 키보드와 집어내기, 펼치기 기능도 보여줬다. 이 기술은 오늘날의 해당 기술과 강력한 연관성이 있으며, 퍼델의 결재를 받아낼 수 있었다.

단 문제가 있었다. 태블릿 하드웨어가 사용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돌리게 될 에너지-효율적인 프로세서는 아직 소비자들이 쓸 만한 정도로 소프트웨어를 돌리기 부족했다. 이 태블릿은 하드 드라이브가 필요했고, 하드 드라이브는 본체에서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했지만, 플래시 스토리지는 당시 필요한 용량이 너무 고가였다. 일단은 키보드가 없어서 훨씬 가볍고, 저렴하며, 노트북보다 더 강력한 태블릿이 필요했었다.

그래서 잡스는 나중에 아이폰으로 되살리기 전까지 프로젝트를 중단 시켰다. 아이폰이 2007년에 나온 이후가 되어서야, 잡스는 다시금 태블릿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아이패드는 아이폰 없이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2007년에는 $600 수준으로 만들어서 팔기가 너무 고가였다. 필요한 저전력 ARM 칩도아직 큰 화면에서 뭔가 돌리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못했다. 게다가 앱스토어의 콘텐트 없이는 아이패드로 뭘 할지 모를 터였다.

그렇지만 2009년, 기술은 준비가 됐다. 마침내 충분한 성능과 충분한 프로세서, 그리고 충분한 배터리가 나와서 유용한 태블릿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멀티터치는 아이폰에서 워낙 인기가 좋아서, 가상 화면으로 이메일이나 웹 주소를 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생소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많은 아이폰을 판매하고 있었기에, 애플은 태블릿용 부품 가격을 감내할 만한 수준으로 낮출 수 있었다.

다만 잡스가 2009년 여름, 간 이식 수술을 받고 돌아온 이후에도 답변이 나오지 않은 의문이 있었다. 어떤 태블릿이어야 하느냐였다. 더 큰 화면의 아이폰? 아니면 별도로 앱을 갖춰야 하는 태블릿? 처음에 잡스는 그저 큰 아이폰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한 친구에 따르면 잡스는 태블릿을 소비형 장비로만 여겼었다고 한다. 아이패드로 문서를 작성하거나 스프레드시트를 편집하지는 않으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킨들과 같은 전자책 리더기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킨들이 나온지 이미 2년 다 돼 가고 있었고, 잡스는 사람들이 점점 독서를 덜 한다고 생각해서, 책을 여전히 읽는 이들은 전자 버전보다는 물리적인 책을 더 선호하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애플의 아이튠스 책임자인 에디 큐와 세계 마케팅 책임자인 필 실러가 잡스의 아이패드에 대한 관점을 확실히 잡아 준 장본인들이었다. 실러는 잡스를 설득하여 무엇이 “소비형 장비”인지에 대한 관점을 바꾸도록 했다. 누군가 문서나 스프레드시트,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보낸다면, 아이패드 사용자도 편집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큐는 잡스가 전자책에 대한 관점을 다시 생각하도록 했었다. 아마존의 킨들이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전자책을 다운로드 받는 독자들도 높은 증가세였다.

2013년 6월, 애플에 대한 법무부의 반독점 재판의 증언에서 큐는 아이패드의 전자책 발전을 설명했었다. “제가 아이패드를 처음으로 손 댔을 때, 저는 아이패드로 우리가 이제까지 시장에서 본 적이 없던 최고의 전자 리더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티브에게 가서 아이패드가 어째서 훌륭한 전자책 리더기가 될 수 있는지를 말했죠… 그리고 몇 번의 논의 끝에 스티브가 다시 돌아와서 제가 옳은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 아이패드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리더기로서, 스토어로서 더 나아질 수 있는지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큐는 아이북 앱에서, 아이북 페이지를 넘길 때 나타나는 “접힌 페이지(page curls)”가 잡스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했다. 또한 모든 아이북 앱에 무료로 들어 있는 Winnie-the-Pooh도 잡스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그는 Winnie-the-Pooh가 아이북의 기능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봤다. 큐의 말이다. “디지털 책에서 이전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채색이거든요.”

***

2010년 4월, 아이패드가 처음 판매에 들어갔을 때, 초반의 시큰둥했던 반응은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애플은 첫 번째 주에만 45만 대를, 첫 달에는 100만 대를, 첫 해에는 1,900만 대의 아이패드를 팔았다. 오히려 소비자들이 얼마나 빠르게 아이패드를 구매하는지 애플이 따라 잡는 데에 6개월이 걸렸을 정도다. 2011년, 아이패드는 DVD 플레이어 판매량을 넘어서서 제일 잘 팔리는 소비자 가전제품에 등극했다.

처음 나온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도 거둔 아이패드의 성과는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2009년과 2010년 사이 안드로이드의 성장률도 매우 우려스러웠던 때였다. 안드로이드의 성장세는 놀라울 정도였지만 아이폰 판매는 그저 빠른 정도였다. 2011년, 애플은 330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이는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를 합친 것만큼이었다. 게다가 애플은 이미 2010년 마이크로소프트를 추월하여 주식 시장에서 최대의 기술 기업이 됐고, 2011년에는 Exxon을 추월, 세계에서 제일 높은 시가를 기록하는 기업이 됐다. 2011년 말, 애플의 현금 보유고는 1천억 달러에 이르러서 만약 이 돈으로 애플이 은행이 된다면 세계 탑10에도 들 수 있는 정도였다.

제일 뚜렷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2011년 중순, 아이패드는 아이폰과 아이포드보다도 훨씬 더 혁명적인 제품임을 증명해낸다. 아이포드와 아이튠스가 음악 구매와 청취 방법을 바꿨고, 아이폰은 사람들의 휴대폰에 대한 기대치를 바꿔 놓았다.

그런데 아이패드는 무려 다섯 업계를 뒤흔들었다. 소비자들이 책과 신문, 잡지를 사고 읽는 방법을 바꿨으며(물론 영화와 드라마 시청 방법도 바꿨다), 이들 사업에서 거둬 들이는 수입만 전체 2,500억 달러, 혹은 미국 GDP의 2%였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팀은 가차 없는 애플의 혁신을 뒤쫓기에 바빴다. 그렇지만 2011년 안드로이드는 거의 모든 전선에서 선수를 빼앗겼었다. 그렇다.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를 합친 것 이상으로 안드로이드 기기 대수는 많았다. 그러나 플랫폼 크기는 그저 크기일 뿐이었다. 애플/구글 전투를 가늠할 유일한 측정 수단이 아니라는 얘기다. 아이폰과 아이패드 덕분에 애플은 여전히 제일 멋진 최첨단 장비를 갖고 있으며, 최고의 콘텐트도 거느리고 있다. 사용하기 쉬운 소프트웨어와 함께, 콘텐트 소유주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돈을 벌 최고의 플랫폼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 모든 면에 앞서서, 아이패드는 또한 개인용 컴퓨터 사업을 뒤흔드는 중이다. 아이패드는 1980년대 PC가 Digital Eauipment 및 IBM으로부터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판매를 잠식해 나아갔던 바와 동일한 방식으로 개인용 컴퓨터를 잠식하고 있다. 실제로 잡스가 예측한대로 아이패드를 세 번째 장비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수는 장비 두 개만 필요하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돌리는 HP나 도시바, 에이서, 레노버 노트북을 빠르게 버리고 있다. 그래서 델은 받은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2013년 초부터 창업자인 마이클 델은 회사를 주식회사에서 다시 개인 회사로 바꾸려 노력하는 중이다.

델이 개중 제일 큰 타격을 받는중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1997년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때, 마이클 델은 애플의 부활을 거의 믿지 않는다면서, 자기가 잡스라면 “차라리 애플 문을 닫고 돈을 주주들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했었다. 여전히 델의 권좌에 앉아있는 마이클 델은 이번주 개인 회사로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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