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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앱스토어, 미니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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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앱스토어, 미니텔

The First App Store

by jvross

1983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계셨나? 아직 아가였건 어른이건 기술의 최전선에서 IBM PC와 혁명적인 로터스 1-2-3에 대해 경탄했을 텐데, 웹 스타트업을 새로 창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인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1983년 당시 16세였던 자비에르 니엘(Xavier Niel)은 애플 2로 코드 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첫 회사, 온라인 섹스 핫라인과 데이트 서비스 네트워크 회사를 세웠다. 1984년 그는 성인용 앱을 통해 매월 수 천 달러에 달하는 수입을 벌어들였다. 그의 마케팅 전술은 무자비해서, 경쟁자들은 그를 산적(brigand)으로 기억했다. 그는 가짜 이름으로 다른 데이트 서비스와 게시판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자기 사이트로 오도록 유혹했다. 비록 사기술에 가까운 그의 전술에 대한 제재가 여러번 있었지만 결국 1987년, 그는 학교를 그만 두고 첫 번째 회사를 매각했다. 그의 다음 사업은 여러가지 앱과 서비스를 마케팅해주는 회사, 일리아드(Iliad)였고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미국에 첫 번째 ISP가 생기기도 전, 가정용 인터넷 연결이 들어서기도 전에 자비에르는 프랑스의 제1세대 스타트업 백만장자 대열에 올라섰다. 이는 모두 인터넷 이전의 초기 인터넷과 앱스토어 이전의 앱스토어 덕분이었다. 작은 터미널, 미니텔(Minitel)이다.

Le Minitel



80년대 초반, 프랑스 정부는 자국의 기술 업계를 다른 나라보다 10년 선도했다. 미니텔이라 불리우는 컴퓨터 터미널을 도입해서였다. 1980년 베타 제품으로 나왔다가 1983년에 공식 출하한 미니텔인데, 전화가 있는 집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미니텔을 받아 사용할 수 있었다. 미니텔의 킬러 앱은 전화번호부책의 디지털화였다. 프랑스 정부는 아예 미니텔의 도입과 시민들의 사용을 가속화 시키기 위해, 공식 전화번호부 책의 생산을 취소했다.

물론 정부만이 실행할 만한 혹독한 마케팅 전략이었지만 정부의 전략은 제대로 돌아갔다. 80년대 말, 650만 가구가 미니텔을 소유했으며, 2000년까지도 5,500만 인구 중 2,500만 인구가 미니텔을 사용중이었다!

Developers Developers Developers

1984년, 정부는 개발자들의 미니텔 서비스 개발을 허용한다. 여기서 정부는 30%를 걷어가고 70%는 개발자 몫으로 했다(어디서 많이 들어 보시지 않으셨는가?). 세계 최초의 앱스토어였다. 미니텔 앱의 사용으로 보자면, 전화요금을 통해 지불하면 그만이기에 별 어려움도 없었다.

https://www.youtube.com/embed/NightOxaRrA

위의 영상은 36 15 게임 광고 영상이다. 모든 앱은 고유 번호를 가져서, 다이얼을 돌려서 접속하면 됐다.

상상하다시피, 개발자들은 미니텔로 몰려 들었다. 90년대 초가 되지 게임과 경마 도박, 날씨 확인, 기차 시간표, 표 구입, 별점과 운세, 은행 계좌 관리, 심지어 이메일의 선구자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수만여 미니텔 앱이 등장했다.

미니텔 앱스토어는 얼마나 거대했을까? 90년대 이미 1년에 10억 달러 규모였다! 프랑스의 인구 규모를 고려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비록 교차점이 곧이었지만, 미니텔이 개발자들에게 준 수입은 애플이 지금까지 iOS 개발자들에게 준 수입을 지금도 능가한다.

기업들은 자기 앱을 지하철과 고속도로 광고판, 텔레비전에서 광고했고, 자비에르와 같은 이들이 보다 더 야심찬 사업을 벌이면서 돈을 벌어들였다. 잠재적인 웹을 처음부터 이해했던 덕분에 그는 프랑스 최대의 ISP인 Free를 창업했다. 현재 그의 재산은 80억 달러에 이른다.


Xavier Niel

The Killer Use-Case

미니텔 초창기 시절, 자비에르는 이미 무엇이 되는 사용인지 이해했었다. 그의 서비스였던 미니텔 로즈는 미니텔에서 제일 유명한 서비스였고, 미니텔을 통해서만 접속이 가능한 80~90년대 프랑스 시장에서의 Tinders이자 Grindrs이자 OkCupids였다. 프랑스인 특유의 로맨틱스러움은 그럴 만하다. 그 외에도 프랑스인들은 세계 다른 곳 사람들보다 수 십년 앞서서 익명의 데이트 서비스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만약 40~50년대 미국인들이 실시간의 익명 데이트 서비스를 10~20대에 했더라면 지금 어떻게 세상이 바뀌었을지 상상해 보시라. 미니텔이야말로 프랑스와 나머지 세계를 문화적으로 구분해줄 수 있다...

제일 유명했던 것은 좀 위험한 광고로 유명한 36 15 ULLA였고, 정상의 시기에는 사용자가 100만 명에 달했다.


"남자들은 무엇을 꿈꾸는가?"

36 15 ULLA는 가까이에 있는 싱글을 찾아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흥미와 바람을 광고할 수 있는 데이트 앱 중 하나였다. 이들 서비스는 수 십억 달러 규모의 사업이었고, 1/3은 정부에게 그 수입이 돌아갔다. 많은 수의 서비스 사용자들은 애인대행과 창녀, 성적 소수자들이었지만 충격스럽게도, 정부는 서비스를 절대로 검열하지 않기로 했고, 도리어 해당 서비스로부터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The Minitel Today

미니텔 네트워크는 여전히 수 백 만 명이 사용중이었지만 2012년 6월에 종료됐다. 미니텔을 사용한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열렸고, 서비스에 대한 접근만이 아니라 수 십년 앞선 방식을 제공하기도 했었다. 미국인들이 온라인에 들어가려 애쓰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마지막까지 미니텔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시라크 전 대통령이 말했듯, 뉴욕의 빵집 주인은 도저히 은행 계좌 확인을 온라인으로 못 하던 시기에, 파리의 빵집 주인은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미니텔의 믿을 수 없을 성공은 프랑스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프랑스 정부의 지원은 미니텔 실패의 주된 이유이기도 했다. 미니텔은 국영이었기 때문에 시장의 요구에 반응하지도 않았고 반응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세계 진출의 야망 또한 없었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얘기다. 우리도 알다시피 미니텔은 결국 부진해져서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팅에게 잠식당했다. 지유 시장이 다시금 승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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