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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 OS X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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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l y a 10 ans, la naissance agitee de Mac OS X [15.09.2010 12:07]

만약 2000년 9월 13일, 애플이 맥오에스텐을 상용으로 내놓았더라면, 맥오에스텐의 역사는 1985년 9월 13일, 존 스컬리가 스티브 잡스를 축출했을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모인 실리콘 밸리의 그 날 점심,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폴 버그(Paul Berg),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만났다. 버그는 잡스에게 DNA 결합 교육 환경이 얼마나 나쁜지 불만을 터뜨리면서, "3M" 컴퓨터를 한 대 만들어달라 요청하였다. 1-메가바이트의 RAM과 1-메가바이트의 픽셀, 그리고 1-메가바이트의 FLOPS였다.

스티브 잡스는 교육과 연구용으로서 고성능 컴퓨터를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넥스트를 창립하였다. 애플로부터 다섯 명, 그리고 당시 24세였던 티베이니언(Avie Tevanian)을 고용한다. 티베이니언은 당시 카네기멜론 대학에서 마흐 마이크로 커널 프로젝트를 이끌었었다. 마흐 마이크로 커널(하드웨어 입출력을 담당하는 시스템 최하단부이다)은 넥스트스텝이라 이름붙여진 유닉스의 운영체제 핵심이 될 터였다. 넥스트스텝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이 입혀졌다.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은 개별 변수(프로퍼티)와 상속 시스템 코드로 이루어졌으며, 프로시저형 프로그래밍에 비해 개발자에게 더 나은 생산성과 속도를 보여준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 엔지니어들이 제록스 팔로알토 연구센터의 실험적인 프로젝트, Alto의 그래픽 인터페이스와 마우스를 보고 놀라워했다는 사실은 우리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때 그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이더넷도 발견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 이 두 기술은 넥스트에서 잡스가 내세운 기술이며, 인터페이스 빌더(오늘날 맥오에스텐의 애플리케이션 개발의 핵심이다), 혹은 웹오브젝트의 기반이기도 하다.


넥스트가 대학교 시장(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CERN에서 세계최초의 웹서버를 만들었을 때 사용한 머신이 넥스트였다)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기는 했지만, 오히려 넥스트는 낙담해야 했다. 결국 1994년, 하드웨어 부문을 포기하고, 이윤이 남을 소프트웨어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넥스트 시스템은 모토로라 68030/040 (매킨토시용 프로세서의 첫 번째 패밀리이다)은 물론, 인텔 x86 칩에서도 잘 돌아갔으며, 수 년 후에도 두 칩 모두에서 잘 돌아갔다.

한편 애플의 상태는 더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윈도 95의 출시가 많이 늦춰지기는 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을 따라잡았고, 당시 시스템 7이라 불리우던 매킨토시용 운영체제는 1991년에 처음 나온 이래 대규모 업데이트 없이 그대로인 상태였다. 가령 보호 메모리(응용 프로그램에 오류가 발생한 경우, 전체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는 방식)를 구사하지 않았고, 멀티태스킹은 협력형 외에 없었다. (이와 반대로 선점형 멀티태스킹은 태스크별로 블럭을 나누는 방식이다. 가령 메뉴를 열 때나 디스크 접근을 할 때를 들 수 있다.) 애플이 사용하는 프로세서 또한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애플은 반응을 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AIM(애플-IBM-모토로라로서 PowerPC 프로세서를 탄생시켰다) 연합을 통해 Taligent를 만들었었다. 여기에는 보호 메모리와 선점형 멀티태스킹, 넥스트스텝과 같은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운영체제인 핑크 프로젝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방향이 달라진다. 애플이 코플랜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코플랜드(Copland)는 새 운영체제의 코드네임으로서, 작곡가인 아론 코플랜드(Aaron Copland)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재정적으로 재앙이었다. 당시 CEO였던 아멜리오는 엘렌 핸콕(Ellen Hancock)을 시켜서 프로젝트를 이끌었지만, 결론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였다. 그래서 운영체제 쇼핑에 나서게 된다. 코플랜드의 몇 가지 요소는 맥오에스 8에 들어갔는데,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이용자용 인터페이스였던 플래티넘(Platinum)이었다.

애플은 두 운영체제 사이에서 머뭇거렸다. 하나는 예전에 애플을 이끌었던 장-루이 가세(Jean-Louis Gassee)의 BeOS였고, 다른 하나는 스티브 잡스의 넥스트스텝이었다. 애플은 1996년 12월, 잡스를 선택한다. 이듬해 잡스는 임시 CEO가 되었고, 넥스트스텝을 사용하기 전에 일단 문제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었다. 잡스는 매킨토시 클론과 뉴튼을 끝냈고, 유명한 광고 캠페인, "Think Different"를 시작하였다. 애플의 근본 가치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소문자 i로 시작되는 기나긴 제품 목록의 첫 번째 주자, 아이맥을 출시하였다.

이 기간동안 넥스트스텝을 PowerPC에 포팅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음악가의 이름으로 코드명을 정하는 전통대도, 이 새로운 시스템의 코드는 랩소디(Rhapsody)였다. 아직 맥오에스텐이 되기 이전이 랩소디다. 랩소디는 처음에 맥오에스 8의 인터페이스에 넥스트스텝을 합쳐놓은 상태였다. 랩소디의 API는 옐로박스(나중에 Cocoa로 이름이 바뀐다)로 이름이 바뀌었고, 코코아를 통해 개발자들은 쉽게 애플리케이션을 윈도용으로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맥오에스 8용 소프트웨어를 계속 사용하기 위한 환경인 블루박스(나중에 클래식으로 이름이 바뀐다)도 랩소디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랩소디 네이티브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에게는 불행히도, 옐로박스를 사용할 경우 맥오에스 8용으로 개발해 놓은 소스코드를 전부 다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써드파티 개발자들의 원성이 커졌다. 최고를 제공하지 않으려든 것이다. 어도비 또한 도약을 거부하였다. (어도비의 강경한 자세는 2010년 4월에서야 Creative Suite 5를 출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애플은 역사적으로 소중한 고객들을 잃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애플은 운영체제 전략을 수정하기로 하였다. 랩소디를 떠나 맥오에스텐이 나온 것이다. 애플은 두 번째 네이티브 API인 카본을 만들어냈다. 카본은 맥오에스텐과 맥오에스 9(1999년에 나왔다)용 소프트웨어도 네이티브로 돌릴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카본용으로 소프트웨어를 돌리려면 소프트웨어 수정이 필요했지만, 코코아가 요구했던 완전한 재작성보다 상대적으로 그 수정의 폭이 적었다. 다만 랩소디는 맥오에스텐 서버의 첫 번째 버전으로 나오게 되었다.


최종 사용자들에게는 어떤 당근을 줄지가 관건이었다. 랩소디는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나, 이용자 눈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2000년 맥월드에서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사용자 인터페이스인 아쿠아(Aqua)를 선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핥아먹고 싶을" 인터페이스였다. iCEO, 잡스의 말이다. "아쿠아는 새로운 OS로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판매 포인트입니다." 맥월드 인터뷰에서 티베이니언이 한 말이다. "'껍데기를 벗겨내면 좀 더 잘 돌아가겠지'라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거기에 상관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아이맥과 파워맥 G3의 파란+하얀색의 본체가 함께 있으니, 바로 아쿠아의 충격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급한 맥 사용자들은 IT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그래픽 디자인에서 빛나는 아이콘을 보려 안절부절 못 하였다.



애플은 카본을 내세우면서, 맥오에스 9로부터 맥오에스텐으로의 이주를 간단하게 할 방법을 찾아냈지만, 맥오에스텐을 완전히 활용하려면 역시 오브젝티브 C와 코코아로 애플리케이션 재작성을 해야 했다. 그래도 애플은 점진적인 압박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카본은 징검다리밖에 못 되었고, 맥오에스텐의 모든 기능을 제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개발자들이 맥오에스텐을 최대한 활용하기 원한다면,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달리 말해서, 애플은 맥오에스텐 프리젠테이션의 첫 1분동안 분명하게 맥오에스텐을 유일한 운영체제로 표시하였다. 맥오에스 9는 될 수 있는 한 빨리 포기해야 하는 운영체제였다. 이어서 맥오에스 9의 장례식이 2년 반 뒤에 일어났다. 클래식에 대한 지원 또한 2007년의 맥오에스텐 10.5에서 중단될 터였다.


2000년 9월에 맥오에스텐 퍼블릭베타가 29.95달러에 출시됐다. (2001년 3월 24일에 나올 정식판에서 할인이 이루어지는 베타판이었다.) 랩소디의 실패 이후, 애플은 부드러운 이주에 집중하고 있었다. 맥오에스 9의 호환성을 집어 넣은 맥오에스텐은 맥오에스 9용 애플리케이션와 새 OS용 애플리케이션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카본은 개발자들을 위해 똑같은 코드로 두 개의 시스템 모두에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유료형 베타 자체는 정말 사용해보고 싶어하는 사용자들을 위한 차원이었고, 그 가격 또한 누구나 마음먹어볼 수 있도록 충분히 낮았다. 건설적이지 못한 참여를 막기에 충분하기도 했다.

클래식은 널리 쓰였다. 맥오에스텐용으로 컴파일된 첫 번째 애플리케이션이 나오기까지는 좀 기다려야 했던 것이 사실이었으며, 맥오에스텐 초창기 사용자들은 맥오에스 9용 애플리케이션을 한동안 계속 사용해야 했다. 맥오에스텐의 장점은 당시 한 가지였다. 특히 시각적인 아름다운 파인더 안에서 맥오에스 9, 즉, 클래식을 재시동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맥오에스텐을 처음부터 환영한 곳은 넥스트용 소프트웨어 개발을 했던 개발사들이었다. The Omni group은 초창기부터 맥오에스텐에 투자하였고, 오늘날까지도 이제 아이패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OmniGraffle과 같은 유명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맥오에스텐용 애플리케이션은 오랜동안 별로 많지가 않았다.

다른 개발사들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린 후에야 맥오에스텐용 업그레이드를 만들었다. 잡스는 영업맨이 되어야 했다. 당시 Director의 포팅을 요구하기 위해, 매크로미디어의 보스였던 롭 버지스(Rob Burgess)를 직접 부르기도 했었다. 어도비에게 부드러운 압박으로 작용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첫 만남은 좀 어색했다. 맥오에스텐은 실제로 급격한 변화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맥오에스텐은 예전 OS처럼 이미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느려졌고, 그것은 참기 어려운 점이었다. 2002년, Jaguar가 나오고 나서야 맥오에스텐은 맥오에스 9의 속도에 근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플은 평범한 사람들도 유닉스를 쓸 수 있게 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애플 운영체제는 모든 매킨토시는 물론이고, 아이폰과 아이포드 터치, 아이패드와 애플티비, 엑스서브 등, 대단히 다양한 기기에서 돌아가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맥오에스텐은 계속 발전해 나가고 있으며, OS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지난날의 유일한 유산인 HFS+ 파일시스템은 나이도 나이이거니와, 요새 저장 수요에 걸맞지 않은 점이 있지만 특별히 단점이 있지도 않다. ZFS를 통합시키려는 실패한 시도가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애플이 어떻게 대처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10년의 세월 동안 맥오에스텐은 언제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에이비 티배이니언에 따르면, 애플은 맥오에스텐의 수명을 20~30년으로 측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살게 되더라도, 그는 놀라지 않을 것이라 답하였다.


Arnauld de La Grandiere
arnauld(arobase)A_ENLEVERmacgener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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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 y a 10 ans, la naissance agitee de Mac OS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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