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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

한국여성재단 박영숙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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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요구를 받아들인 것 같아.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노(No)’ 하지 않고 처한 상황에 맞게 피하지 않고 대응했으니 말야. 그렇게 다양한 운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여성운동가, 환경운동가, 정치인…. 그만큼 다양한 수식어로 표현되는 여성원로도 없을 것이다. 바로 한국여성재단 박영숙 이사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긋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투피스를 너무나 잘 소화한 모습, 그리고 세월이 만들어준 나긋한 인상이 마냥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존경과 애정. 그리고 그리움을 숨기지 않았던 지금은 고인이 된 남편 한신대 안병무 명예교수 얘기까지. 한국여성재단 박영숙 이사장의 미니 에세이를 펼쳐본다.


▲ 환갑이 넘어 영국유학을 떠나 만학을 시작했지만 그 당시의 경험이 현재 일을 하는데 있어 큰 힘이 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내 인생…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국내에서는 70년대 후반부터 환경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당시 가족계획 차원에서 산아정책이 활발한 때라 나 역시 어머니 교실 강의를 나가는 등 활동이 한창이었지. 지금은 아이를 낳으라고 난린데 말야. 그런 걸 보면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20년 앞도 못 내다 보는 게 사람인 것 같아. 지구 온난화만 해도 그렇고. 앞으로 더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발생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

50년대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 당시부터 박영숙 이사장은 여성운동에 가담했고 인권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환경운동에 눈이 트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다 다시 여성운동. 그리고 시민사회운동 특히 기부문화에 관심 갖게 됐다고 한다.
‘사회-여성-환경’ 모두가 별개가 아닌 만큼 자연스럽게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을 해 온 셈이다.
그리고 박 이사장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저 오래 살다보니 여러 가지 거치게 되는 것”이라며 겸손의 말을 전한다.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는 나의 유산

“리우회의에 갔던 92년은 그 전 해에 국회의원직을 그만뒀던 시점으로 당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와 관련해 환경을 먼저 떠올리더군.”
당시 이미 환경사회정책연구소가 만들어져 있었지만 리우회의에서 돌아온 후 새롭게 평생직으로 감당하려고 만들었음을 강조한다. 가족과 살고 있는 집을 줄여가면서 남은 돈으로 만든 연구소이며 당시만 해도 환경정책을 담당하는 기구가 없는 상황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제 돈 들여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컸다는 것.
“소장직에서 물러났지만 문을 닫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맡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데 새로운 의미가 있지. 현재 소장은 미정이지만 3월부터 전 서울시 정책기획실장 도명정 한양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이사장을 맡고 있어.
환경도 변했고 세월도 흘렀다. 그리고 이제 연구소도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연구소를 유지해 나갈 계획이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남편

“난 상당히 바보스러워.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남편(고 안병무 교수·한신대 명예교수)이라고 생각하거든. 내게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줬으니 말야. 신앙만 해도 난 단순한 보수적인 신앙만을 생각했는데 남편은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연민의 정까지 생각하게 해 줬어. 말년에 나를 계속 공부시켰고 일을 계속 하게 만든 것도 바로 남편의 노력 덕분이었으니.”

박 이사장에겐 남편이 삶의 동반자이자 스승이었음을 회고한다. 박 이사장을 제자인양 항상 가르치고 칭찬도 잘해줬다고 말이다. 물론 남편의 모니터링은 박 이사장에게도 할 기회를 줬음을 강조했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 이사장의 외조가 상당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니 말이다.
“외조가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온 식구들이 평생 일을 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남편이) 터득시켜줬다고 할까.”
박 이사장은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해 오고 있지만 성숙기에 관심 가진 게 바로 환경문제란다. 만학을 통해 학습과정을 거친 게 아직까지도 유익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물론 그 역시 남편의 배려였음을 강조했다. 평생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자 전문성을 갖추고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줬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박 이사장은 다시 태어나도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머뭇거림 없이 답한다.
한번도 남성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다지만 다시 젊은 날을 즐길 수 있다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정말 제대로 받아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다.
“지금은 사람들의 수명도 길어졌고 끝까지 현역으로 뛰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쌓는 게 중요하지. 외국어 능력을 쌓는 것도 그의 일환이야. 내가 환경에 전문성과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도 62세 때 떠난 영국 유학 시절이었으니 말야. 만학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의 공부를 젊은 날 경험했다면 더 좋은 기회가 됐을 거란 아쉬움이 남아.”


내 나이 일흔 여섯. 아직도 뛸 나이

“아쉬운 건 나이를 불문하고 현직에서 열심히 뛰는 사람들이지. 특히 오가다 사다코를 존경해. 언급했듯 젊은 날보다 많은 지식을 쌓지 못한 데 후회가 남지. 그 결과 지금도 여러 부분에서 ‘어정쩡’한 게 아쉬운 부분이야.”

누가 봐도 정규 교과과정을 모두 이수했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한 그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아직도 모자라게 느껴지나 보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조직에서의 관계다.
“인간관계를 보다 밀접하게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네. 일이 바쁘다는 핑계도 있지만 내 성격의 결함도 있겠지? 긴밀하게 못 했다는 게 말야.”
국회의원 활동 당시 여성운동가로서 가족법 개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탁아법 제정 등 그간의 숙원과제들을 시원히 해결하는 등 당시 박 이사장을 두고 여성정치가의 새 모델을 제시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여성이 정치 참여한다는 게 그다지 관심이 없을 때인 만큼 그 3대 과제를 하면서 국회에서의 위상도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치는 박 이사장과의 운명이 아니었던 걸까. 의회에서 원내활동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당에 뿌리내리는 정치도 중요한데 이 부분만큼은 전공이 아니었음을 회고한다.
“정당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도 정치 활동을 하고 있겠지. 그때 난 역시 시민사회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야.”


[#사진7]내게도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박 이사장은 아무래도 국제적인 활동을 해야 할 기회가 많은 만큼 외국어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다. 하지만 유난히 외국어 실력이 자신만만하지 못하다며 자신의 콤플렉스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한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콤플렉스도 있다. 바로 레크리에이션 재능이 없다는 것. 가장 큰 콤플렉스이자 스트레스라고 털어 놓는다.
“그래도 부득이하게 노래를 하게 된다면 ‘모닥불’을 부르는데 그것도 완벽하게는 못 해. 연주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다행히 우리 아들은 날 안 닮아서 노래도 잘 하더라고.”
은근히 남편과 외아들의 노래실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말을 맺은 셈이다.
“또 내 콤플렉스와 연결되지만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네. 하기 싫은 공부하는 게 아니라 세계화 시대에 살려면 자신의 생업과 관련한 전문성을 키우고 외국어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거지. 그것은 필수인 것 같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어야 해.”
그래서인지 10대, 20대 학생들에게 꼭 해야 할 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공부다. 평생 살 수 있는 기본적이 전문성과 언어능력. 바로 젊은 날 닦아야 한다고 말이다.


“환경·여성활동가들 복지개선 이루고파”

“여성재단 일을 하고 평생 여성운동 활동가 역할을 하면서 지금 내가 새롭게 하고 싶은 과제가 있다면 가장 취약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 게 관심을 갖는 일이지. 그리고 그들은 바로 여성단체의 활동가들이야. 물론 환경단체도 마찬가지지.”

한국여성재단에서의 박 이사장 임기는 내년 12월이면 만료된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희망포럼이나 미래포럼 역시 사회 원로로서 활동하고 있는 것인 만큼 재단에서의 임기가 끝나게 되면 원로로서의 일도 상당 부분 손을 놓게 된다.
그런 만큼 애정을 갖고 개선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졸업 후 5년까지는 열정을 갖고 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활이 유지돼야 활동이 되는데 월 50만~60만원을 받고 어떻게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기본조차 안 돼 있으니 활동가들의 활동조건 개선이나 복지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박 이사장이 새롭게 주력할 부문이 여성·환경을 막론하고 활동가들의 활동조건 개선이라면 환경운동은 말 그대로 ‘평생회원’이다. 환경운동이 정지 상태일 수밖에 없는 현 참여정부에 대한 아쉬움도 많지만 70대 원로로서 아직도 여성환경연대의 으뜸지기로 활동하는 모습만 봐도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박 이사장이 강조하는 환경운동은 결코 거창한 게 아니다.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풀뿌리 운동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여성활동을 위해 활동가들에 관심을 갖고 싶다는 바람. 적어도 본인만큼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무언의 책임감, 원로로서 후배들을 향한 따스한 베풂이 아닌가 싶다.    


M i n i E s s a y ···

♣어렸을 적 꿈은? 현재의 꿈은? 어렸을 적, 외정시대 때 친구들과 동둑에 앉아 생각했던 건 ‘공적인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것. 사회운동을 하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의 소망? 지금 나이에는 어떻게 삶을 잘 마감할까 하는 생각만 하게 되네.

♣주량은? 술에 얽힌 에피소드는? 술은 별로 즐기지 않아. 건배 정도 할 뿐이지. 결혼을 굉장히(?) 늦게 했잖아. 내 나이 38살 되기 3일 전, 남편 역시 48세 되기 3일 전 결혼을 했는데, 우리 남편이 술을 엄청 주는 거야. 그 당시 뭣 모르고 많이 마셨지. 그때 엄청 고생했던 기억이 잊어지지 않아. 결혼하니까 남편이 시험적으로 먹인 것 같은데 그 후로는 남편도 절대 내게 술을 권하지 않더군. 물론 나도 안 마시게 되고 말야.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요즘은 그럴 새가 없어서 아쉽지만 오전 10시쯤 창에서 햇살이 비칠 때... 창가에 앉아 차 한잔 마실 때 가장 행복해. 일부러라도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지. 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을 하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지.

♣혹시 좋아하는 연예인 있는지? 나? 물론 있지. 사람 자체보다는 역할을 많이 보는 것 같아. 그때그때마다 달라지긴 하지만 최근에는 주몽(송일국)이 좋던데. 역할도 잘 소화하고 말야. 소서노(한혜진) 같은 여성도 아주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어(웃음).

♣아침식사는 꼭 챙겨야 한다? 절대 그렇지 않아(뜻밖의 대답에 순간 놀랐음). 차 한 잔이면 족하다고 생각해. 20년이 넘는 집안 습관이지. 하지만 저녁식사에 야식을 즐겨 먹는 안 좋은 습관이 있어. 아침과 점심은 거르더라도 저녁은 못 굶지. 가끔 단식을 할 기회가 있는데 아침, 점심 굶는 건 단식에 해당되지도 않아. 저녁을 굶어야 비로소 진정한 단식이 되는 셈이지. 아침과 점심은 얼마든지 굶을 수 있으니 말야.

♣지구 멸망 한 시간 전이라면? 지구멸망에 대비한 적은 없는데. 내 생명이 끝날 날은 생각해 봤어. 지금도 가끔 한가한 시간에는 생각해. 어떻게 삶을 마치나, 주변 정리는 어떻게 하나… 막상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그 많은 사진들, 내 물건들을 어떻게 할지도 생각하고 말야. 타인에게 부담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거든. 젊을 적에는 산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으리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을 만큼 사람들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있지.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 내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직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자신만만(특히 강조)하게 일하는 사람. 아까 얘기한 유엔 제8대 난민 판문관 오가다 사다코는 아직도 국제무대에서 현역으로 멋지게 활동하고 있지.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말야.

♣스트레스 받을 때 해소법? 그냥 집안 정리, 빨래하면서 푸는 것 같아. 국회 들어갈 때, 남편과 아들에게 가사를 맡기기 전까지는 집에 세탁기조차 없었어. 당시에는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였지만 스트레스 해소에 좋았던 건 바로 펌프였어. 여름에 펌프질 하면서 빨래했을 때 콸콸 쏟아지는 물과 차디찬 물줄기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네.

♣현재 수입 중 가장 많은 지출을 하는 부분은? 역시 기부지. 이 나이가 되면 회비 이상의 기부를 해야 하지. 먹고 사는 거, 입는 거는 다 옛날거야. 자녀 교육비도 안 들고. 많이 먹을 것도 없지, 대부분의 지출이 기부야. 회비가 절대적으로 많이 나가. (구체적으로 묻자) 정기적으로 나가는 연회비가 30~100만원. 기념사업, 출범식 때 보통 100만원 이상, 특별헌금 등 적은 액수를 낼 수 없는 입장이지. 80% 이상이 다 그렇게 나가는 거라고 보면 돼. 나 자신을 위해 나가는 돈은 20% 남짓 할까.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는지? 난 만족 안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쯤이면 만족하라 그러네. 하지만 열심히 산 것만큼은 나 역시 인정해. 만족스럽게 성과를 올린 건 아니지만 말야.



***박영숙 이사장이 걸어온 길***

1932년 5월 28일 평남 평양 출생

학력 사항
~ 1955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 1958 필리핀 파이스트대 대학원 정치학과 수료
~ 1991 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1993 ~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환경학연구

주요 경력
1963 ~ YWCA연합회 총무
~ 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1987 ~ 평민당 부총재
1988 ~ 1992 13대 국회의원(평민당, 전국)
1991 ~ 신민당 국회의원, 여성특위원장
1992 ~ 민주당 환경특위원장
1992 ~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 공동대표
1999 ~ 현 한국여성기금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2001 ~ 현 CEO 환경경영포럼 고문
2002 ~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 현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 현 녹색서울시민위원회 공동대표

주요 수상내역
1990 올해의 환경인상
1992 올해의 여성상
1998 국민훈장 모란장/제3회 여성주간 유공자
2000 김활란 여성지도자상
2001 제7회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2004 국민훈장 무궁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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