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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 무덤의 800년 미스터리 곧 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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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있는 칭기즈칸릉. 시신 대신 유물을 모아 조성한 '의관총'이다.
중국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있는 칭기즈칸릉. 시신 대신 유물을 모아 조성한 '의관총'이다.
칭기즈칸이 무덤에서 깨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9일 중국의 과학기술매체인 텅쉰과기는 “2010년부터 칭기즈칸의 무덤을 추적해온 린위민(林宇民·앨버트 린) 박사가 최근 칭기즈칸의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산티아고 분교 소속의 중국계 미국인 연구원인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후손”을 자처하며 칭기즈칸의 매장지로 추정되는 6000㎢가 넘는 지역을 인공위성과 무인기 등을 동원해 추적해 왔다.

이를 통해 촬영한 8만4000여장에 달하는 위성사진 등을 바탕으로 도로와 하류를 비롯한 대규모 매장 흔적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해 왔다. 이 과정에는 린위민 박사를 비롯해 1만명이 넘는 연구지원자가 함께 참여했다. 그 결과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장지를 55곳으로 압축해 낸 것.

린위민 박사는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는 ‘대칸(칭기즈칸)의 계곡’이란 국제 프로젝트의 주축 인물이기도 하다. 그간 린위민 박사가 소속된 미국 캘리포니아대를 비롯 몽골과학원, 국제몽골연구협회, 전미지리학회 등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왔다. 린위민 박사 측에 따르면, 곧 압축된 55개 지점에 대한 몽골 현지 조사에 나설 것이라고 한다. 계획대로라면 지난 800년간 인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혀온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드러나게 되는 셈이다.

동서양을 통틀어 세계 최대 정복자인 칭기즈칸 테무진이 사망한 것은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자신이 사망한 뒤 밀장(密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1만여필의 말을 동원해 시신을 묻었던 곳을 철저하게 말발굽으로 다지는 식으로 평장(平葬)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매장에 참여했던 과정에 마주쳤던 모든 사람을 죽이고, 호송 인원과 말들을 함께 순장(殉葬)시킨 것으로도 전한다. 도굴 등에 의한 무덤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로 인해 칭기즈칸의 사망 이후부터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칭기즈칸이 매장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역사상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무덤은 전 세계 고고학자들뿐만 아니라 도굴꾼들에게도 늘 관심거리였다.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만큼 칭기즈칸의 시신과 함께 막대한 부장품이 묻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몽골을 점령했던 권력자들 역시 칭기즈칸의 무덤에 줄곧 지대한 관심을 표해왔다. 특히 만몽(滿蒙) 연합정권인 청(淸)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일대를 정벌하고 칭기즈칸의 ‘대원전국(大元傳國)’ 옥새를 수중에 넣은 직후 황제를 자처했다. 또 청나라 옹정제는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의 유물을 모은 ‘의관총(衣冠冢)’을 조성해 칭기즈칸을 신성시해 왔다.

내몽골 일대를 다스렸던 장제스(蔣介石) 역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칭기즈칸의 의관총을 칭하이(靑海)의 타얼스(塔爾寺)로 피신시켰다. 반대로 일제는 중일전쟁 때 내몽골 일대를 점령한 뒤 ‘몽강국(蒙疆國)’이란 괴뢰정권을 세워 칭기즈칸 무덤 발굴에 나섰다. “칭기즈칸이 미나모토 요시쓰네(源義經)”라는 전설을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미나모토 요시쓰네는 일본에서 추앙받는 헤이안 말기의 무장으로, 칭기즈칸과 활동 시기가 비슷하다. 이에 상당수 일본인들은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곧 칭기즈칸”이라고 믿고 있다. 일본은 1990년대에도 몽골과 함께 칭기즈칸 무덤 공동탐사를 진행했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외곽에 있는 칭기즈칸의 초대형 기마상.
반면 지금까지 칭기즈칸의 무덤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는 몽골족 원(元)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에 나와 있는 ‘장기련곡(葬起輦谷)’이란 네 글자가 전부였다. ‘기련곡에 묻었다’는 뜻으로, 후대의 학자들은 기련곡의 위치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게다가 칭기즈칸이 동서양에 걸친 워낙 넓은 대제국을 세운 까닭에 ‘기련곡’의 위치 역시 중국, 몽골, 러시아 등지로 의견이 팽팽히 엇갈렸다.

현재로서 칭기즈칸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련곡’으로 가장 유력한 곳은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동북쪽에 있는 컨티산맥 일대다. ‘몽골비사’에 등장하는 부르한산(不兒罕山·부르칸 칼둔산)이 바로 이곳이다. 칭기즈칸이 태어나 청년 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성산(聖山)이다. 이에 역사가와 고고학자들은 칭기즈칸이 있다면 컨티산맥의 부르한산 어딘가쯤에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반면 중국의 상당수 학자들은 닝샤(寧夏)회족자치구의 류판산(六盤山) 일대를 매장지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은 서하(西夏) 원정을 벌이던 1227년 8월, 류판산 인근에서 66세의 일기로 병사했다. 회족자치구인 닝샤는 옛 서하국의 영역이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부패하기 마련인데, 죽은 시신을 들고 몽골 초원까지 가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란 것이 류판산설을 주장하는 근거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 때 원나라를 방문했던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칭기즈칸이 알타이산에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알타이산은 현재 몽골과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사이에 있는 산맥이다. 반면 일부 러시아 학자들은 “칭기즈칸이 바이칼호수에 수장(水葬)돼 있을 것”이란 주장을 펴기도 했다. 몽골인들이 신성시하는 바이칼호수는 몽골의 북쪽 국경 너머에 있어 수장 가능성도 없지 않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중국계 미국인의 손에 의해 발견되면 몽골 출신 칭기즈칸의 중국인화(化)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현재 “칭기즈칸이 각 민족 통합에 지대한 공을 기록했다”며 우상화하고 있다. 또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를 자신들의 정사(24사)에 편입시켜 가르치고 있다. 1954년에는 내몽골자치구 오르도스에 칭기즈칸 의관총을 대대적으로 중수한 뒤 ‘5A급’(최고급) 국가문물로 지정해 짭짤한 관광수입마저 올리고 있다. 2004년에는 몽골족 배우 바썬(巴森)을 주연으로 한 30부작 대하드라마를 제작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중국화에 맞서 몽골에서도 2008년 울란바토르 동쪽 외곽에 40m 높이의 칭기즈칸 초대형 기마상을 조성해 관광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곳은 칭기즈칸의 황금 채찍이 발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무덤 발굴 등 고고학 기술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다. 중국은 1974년 중국 시안에서 진(秦)시황의 병마용을 발굴해낸 이후부터 이미 세계 정상 수준이다. 그 결과 2009년에는 ‘삼국지’ 위(魏)나라 무왕 조조(曹操)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 또 2013년에는 ‘대운하’로 잘 알려진 수(隨)나라 양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하는 등 매년 굵직굵직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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