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일제 강점기 때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떠돌이 약장수가 켜는 바이올린에 관심을 갖고 당시 초등학교 4학년 때 일본인 교사를 만나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웠다.[1]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조선인 차별을 이겨내고 주경야독하면서 야간중학교를 졸업했고, 1955년 메이지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1]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영어교사가 되려고 했으나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스트라디바리우스에 대한 강연을 듣고 바이올린 제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1] 1957년부터 건설현장의 폐자재를 활용하여 바이올린을 만들었는데, 수소문 끝에 당시 일본의 3대 바이올린 연주 거장으로 칭송받던 시노자키 히로쓰구(篠崎弘嗣, しのざき ひろつぐ)에게 바이올린을 팔면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시노자키는 홍난파 및 안익태의 대학교 동창으로, 당시 조선 유학생들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으며 차별받는 위치에 있던 진창현의 고통을 이해하고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후 한일 국교가 수립된 뒤 대한민국의 고향 김천을 찾았으나, 이복 형이 그를 북한의 간첩이라고 정부기관에 고발했다. 진창현은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고문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험이 오히려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면서 더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어야겠다는 동기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바이올린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각종 실험에 몰두하였다.
1976년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5개 종목에 걸쳐 금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984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마스터 메이커'[2](Master Maker)의 칭호를 받았다.
2008년 10월 세계 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아[3] 명예를 회복했다.
현재 도쿄 센가와(仙川) 소재 진(陳) 공방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계속하고 있다.
[편집] 평가 및 매체
진창현의 바이올린은 명기(名器)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경화, 강동석, 아이작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등 명연주자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2004년 11월 27일 후지 TV에서 그의 일생을 드라마로 각색한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峡を渡るバイオリン)이 방영되었다.[4] 2005년 SBS 특집 다큐멘터리 《천상의 바이올린》을 통해 그의 삶이 대한민국에 소개되었다. 2008년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2학년 영어교과서에 소개되기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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