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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닫는 홍대앞 리치몬드
권상범 제빵 명장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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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201/31/htm_201201311301230103011.jpg)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것도 있구나.’
앙꼬빵 한 조각이 입 안에서 녹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나이 열다섯, 새로운 세계를 맛보았다. 경북 의성에서 외삼촌이 빵가마 하나 들여놓고 하던 작은 다과점 주방에서였다. 나는 1945년 경북 봉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나와 두 여동생을 키우셨다. 고픈 배를 안고 풀뿌리를 씹으며 다짐했다. 기술을 배워 자식이 태어나면 가난이 아닌 기술을 물려주겠노라고.
처음 맛본 빵은 ‘구원’이었다. 여기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 어차피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도 못됐다. 의성과 대구의 제과점에서 기술을 배우다 64년 19세 때 단돈 2000원을 들고 홀로 상경했다. 온갖 구박을 받아가며 기술을 배웠고, 스무 살에 풍년제과에 취직했다. 오븐 곁에서 하루 3~4시간 칼잠을 자며 빵만 연구한 끝에 27세에 나폴레옹 과자점 공장장이 됐다.
![](http://pds.joinsmsn.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201/31/htm_201201311301530103011.jpg)
‘그래. 수도꼭지를 여기에 놔달라고 말했었지.’ 오늘 아침 가게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눈으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건물을 지을 때부터 땅 주인과 함께했다.
지난해 4월 건물주로부터 ‘내용증명’이 왔다. 1월 31일로 계약이 완료되니 가게를 비우라는 통보였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5년 전 재계약 때도 프랜차이즈 대기업의 빵집에 자리를 내줄 뻔한 걸 보증금과 월세를 두 배씩 올려주고 지켜냈다. 손이 떨렸지만 제빵인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을 다쳐 한동안 아팠다. 신장과 장에 탈이 나 병원 중환자실 신세도 졌다. 하지만 리치몬드 성산·ECC점과 제과학원을 생각하며 다시 힘내기로 했다. 홍대점 폐점을 안타까워하는 성원도 위로가 됐다. 리치몬드에서 선 봐서 결혼했다는 부부, 학생 때 먹은 리치몬드 빵을 결혼 후 임신해서 챙겨 먹었다는 여성 고객…. 뻥 뚫렸던 가슴이 조금씩 채워졌다.
백화점 입점, 프랜차이즈 사업 제안을 숱하게 거절해 왔다. “빵 만드는 노동자가 되면 안 된다”는 신조 때문이다. 남이 정한 품목을 남이 시키는 대로 만들면 미래가 없다. ‘아픈 빵’ 골라내고 품질 책임지는 일도 못하게 된다.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 해.” 나는 빵 만드는 사람이고, 이것은 하늘이 주신 직업이다. 이 한 가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었고, 가르쳐왔다. 내 죽을 때까지 할 거다. 리치몬드는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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