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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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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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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Lee Seung-Yeop
오릭스 버팔로스 No.3
YG-Lee-Seung-Yeop.jpg

요리우미 시절 이승엽 (2009년)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
출신지 대구광역시
생년월일 1976년 8월 18일(1976-08-18) (34)
신장 183 cm
체중 85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1루수, 좌익수
프로 입단 연도 1995년
첫 출장 KBO / 1995년 4월 15일 잠실 대 LG
NPB / 2004년 3월 27일
획득 타이틀 1997년 한국 프로 야구 홈런왕, MVP
1999년 한국 프로 야구 홈런왕, MVP
2001년 한국 프로 야구 홈런왕, MVP
2002년 한국 프로 야구 홈런왕, MVP
2003년 한국 프로 야구 홈런왕, MVP
연봉 1억 5000만 엔 (2011년)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올림픽 2000년 · 2008년
WBC 2006년
아시안게임 2002년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국기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야구
올림픽
2008 베이징 야구
2000 시드니 야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 샌디에이고 2006 WBC

이승엽(李承燁, 1976년 8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며, 전 한국 프로 야구 삼성 라이온즈 선수이자 일본 프로 야구 퍼시픽 리그오릭스 버팔로스의 소속 선수(내야수)이다.

투구와 타석은 좌투 좌타이며, 수비 위치는 1루수, 별명은 ‘라이언 킹’, ‘국민 타자’라는 애칭이 유명했고, 일본 진출 이후에 붙여진 애칭은 ‘승짱’(일본어: スンちゃん, 한자 및 일본어 동시 표기: スン様)이다. 최근에는 일본의 스포츠 신문《스포츠 호치》의 2008년 8월 22일자 보도 기사에 언급된 것처럼 올림픽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같은 국제 대회에서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내는 데에 기여함으로써 많은 병역 미필 선수들의 병역을 면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여 “합법적인 병역 면제 브로커”라는 별명이 추가되었다.[1]

목차

[숨기기]

[편집] 아마추어 야구 경력

청소년 시절 투수타자, 양쪽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 팀 우승을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2]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이승엽은 투타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 우승을 이끌었다.[3][4]

[편집] 한국 프로 야구 경력

[편집] 삼성 라이온즈 시절

고등학교 졸업에 맞추어 대구광역시 연고 지명을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 원에 연봉 2천만원을 받으며 1995년 프로 야구단인 삼성 라이온즈에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고교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5][6]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박승호 코치로부터 1년만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그는 타자로 완전히 전향하였다.[7]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 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김승관(현 상원고 코치)은[8] 상대적으로 기회가 적어져 2004년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된 후 2007년 방출을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면서 프로 첫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1루수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4][9]

  • 1995 시즌 0.285의 타율과 13개의 홈런과 73타점을 기록해 초단거리 타자로서 자질을 보였고, 이후 당시 삼성의 감독이던 백인천에게 ‘인천 부두 타법’을 전수받은 뒤 본격적인 홈런 타자로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10]
  • 1998 시즌에 38개 홈런과 100타점을 기록하여 당시 타이론 우즈와 시즌 최다 홈런 경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2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그는 팀의 주축 타자로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 1999 시즌에 홈런(54), 타점(123), 득점(128), 출루율(0.458), 장타율(0.733)을 기록하며 타격 5관왕에 올랐고, 한국 프로 야구 최초로 50홈런을 넘어서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편집] 일본 프로 야구 경력

[편집]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편집] 2004년

2003년 12월에 지바 롯데 마린스와 계약하였다. 연봉은 2억 엔이었는데, 롯데 멤버 중 이승엽을 제외하고 2억 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다른 롯데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롯데가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 상대 투수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대표적인 에이스 투수이자 ‘괴물 투수’인 마쓰자카 다이스케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그 무렵 KAIST에서는 “일본에서도 40홈런 이상 가능하다”라는 예상을 했으나, 시즌 종료 후 그가 기록한 성적은 14홈런, 타율 0.240, 50타점으로 목표로 내세웠던 30홈런, 타율 0.290, 타점 100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또 롯데에는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1루수 후쿠우라 가즈야라는 존재가 있어 이승엽은 지명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편집] 2005년

시범 경기에서 타율 0.050이라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면서 결국 2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4월 초 1군으로 복귀하면서 팀의 중심 타선으로 정착했다. 단 상대팀 선발 투수가 좌완일 경우 선발 타선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후쿠우라의 존재로 인해 좌익수로 종종 출장하기도 했다. 시즌 최종 타율은 0.260이었지만 홈런수가 팀내 최다인 30개로, 전년도에 비하여 장타력에서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고, 롯데의 플레이오프 진입에 다소나마 공헌했다. 그러나 3회 이상 대전 경험이 있는 투수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성향이 있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타율 0.176, 타점 0, 삼진 7개를 기록하여 매우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 초면인 한신 타이거스 투수들에게 매우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우선 1차전에서 만난 한신의 좌완 에이스인 이가와 게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고, 2차전에서도 좌완 에구사 히로타카로부터 홈런을 기록했다. 3차전은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되었지만 4차전에서는 스기야마 나오히사로부터 선제 홈런(2점 홈런)을 쳐내는 등의 활약을 보이며 롯데가 1974년 이후 31년 만의 일본 시리즈 챔피언 획득에 공헌,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2005년 시즌 종료 후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친정 팀인 대한민국의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 5번과 3번 타자로 출전했으나, 7타수 무안타, 1타점으로 부진했다.

[편집]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편집] 2006년

2005년 시즌이 끝나고 지바 롯데와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재계약을 하는 듯했으나 수비 위치 보장 등 본인의 의사와 롯데가 내세운 조건이 맞지 않았기에 자유 계약 선수 (FA)가 되었다. 이후 감독으로 재부임한 하라 다쓰노리 감독 아래 팀 전력의 보강을 꾀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2006년 1월 19일에 전격으로 계약하였다.[13]

하라 감독은 이승엽을 개막전 4번 타자로 파격 기용하였는데, 이러한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듯 이승엽은 일본 진출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반면 그의 맹활약과는 반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팀 자체는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진과 부상자 속출하는 등으로 인해 2005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가 기록한 2006년 성적은 타율 2위(0.323), 타점 3위(108), 홈런 2위(41개[14])를 기록하여 공격 전 부문에서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쳤다. 특히 홈런에서는 일본 진출 이후 최다 홈런을 기록했는데 6월에는 12개를 몰아치며 리그 홈런 1위에 올라섰다. 그러나 8월 중순 경 발생한 무릎 부상 이후 홈런 페이스가 주춤해졌고, 시즌 중반부터 페이스를 높여 온 주니치 드래곤스타이론 우즈에게 홈런 숫자에서 추월당하면서 결국 리그 최다 홈런 2위로 2006 시즌을 마감하였다.

[편집] 2007년

2006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에 진출하려고 했던 이승엽은 소속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승 이후로 메이저 리그 진출 시점을 연기하였다(실제로는 “메이저 구단들로부터의 오퍼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라는 비판도 있었다[출처 필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맺은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소속 구단 요미우리가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엽의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천만 엔(약 한화 70억원) 정도. 이는 이전 요미우리 소속이던 로베르토 페타지니의 7억 엔 뒤를 잇는 금액이다(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 엔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2007년 1월, 이승엽은 어머니의 타계 소식을 일본에서 전해 들었고 왼쪽 엄지손가락에 염증이 생기는 등 시즌 내내 고전하였다. 외다리 타법을[10] 고쳐 보기도 했지만 성적은 계속 신통치 않았으며, 7월 중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시즌 후반기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는 등 다소 부진에서 벗어났고, 시즌 말미에는 승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홈런을 여러 개 쳐 내며 요미우리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하는 등 장타력이 실종된 모습을 보이며 시즌을 마감하였다.[15] 종합적으로 2007 시즌에는 타율 0.274, 74타점, 30홈런으로 전년도에 비해 다소 부진한 성적을 남겼다. 4번 타순에서는 0.243을 쳤으며, 종종 5, 6, 7번 타순으로도 움직였는데, 이 세 타순에서는 0.292부터 0.368까지 높은 타율을 기록하여 4번 타자로서 2년차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했다는 분석이 있기도 했다.[16]

[편집] 2008년

시즌 초반에는 심각한 슬럼프에 빠지며 2군으로 강등되었다.[17] 그러던 중 8월에 있은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의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특히 그는 4강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투런 홈런을,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투런 홈런을 뽑아 내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18][19] 그러나 그해 요미우리에서 45경기에 출장하여 2할 4푼 8리의 타율에 7할 5푼 5리의 OPS를 보였으며, 8홈런 27타점에 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 시리즈에서도 극도의 부진을 드러냈다. 그해 일본 시리즈는 센트럴 리그 우승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퍼시픽 리그 우승 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의 경기로 진행되었다. 이승엽은 7경기 동안 홈런과 타점 없이 18타수 2안타(타율 0.111)에 삼진을 12개나 당하는 등 극심한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20] 게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회장 와타나베 쓰네오가 한 차례(5차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한 이승엽에 대한 기용에 대해 “이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다”라고 뼈있는 말을 했다.[21]

[편집] 2009년

전년도 시즌을 아주 저조한 성적으로 마친 이승엽은 스스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불참을 선언하며 시범 경기에서만 8개의 홈런을 기록하는 등 2009년 시즌에 대한 기대를 하게 했다. 기대에 부응하듯 시즌 초에는 많은 홈런을 기록하며 진짜 부활하는 듯했으나 시즌 중반으로 갈수록 페이스가 떨어졌고, 7월에는 시즌 처음으로 2군에 내려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팀이 정규 시즌 우승 헹가래를 칠 때도 이승엽은 그 자리에 없었고, 결국엔 2군에서 정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2경기 선발 출장을 했으며, 그 외의 경기엔 대타로 주로 출전하였다.

홈런 16개와 타율 2할 2푼 9리로 시즌을 마감한 그는 일본 시리즈가 끝난 이후인 11월 14일나가사키 현 빅N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일 클럽 챔피언십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 8번 타순으로 배정되어 1루수로 선발 출전, 2루타 두 방을 날리며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22]

[편집] 2010년

타격면에서 예년에 비해 크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시즌 내내 2군과 1군을 오가면서 최종 성적 5홈런 11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시즌 막판 1군 레귤러 멤버에 다시 포함 된 뒤 요미우리의 센트럴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제대로 된 성적을 내지 못하자 시리즈 도중 제외되는 굴욕을 겪었다. 시즌 종료 후 2010년 11월 16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부터 방출통보를 받았다. 이후 일본 잔류를 위해 팀을 물색하던 이승엽은 결국 퍼시픽 리그 소속의 오릭스 버팔로스와 1억 5천만엔에 플러스 옵션이 포함된 연봉으로 계약하여 일본 야구에 잔류하게 됐다.

[편집] 오릭스 버팔로스 시절

[편집] 201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퍼시픽 리그의 오릭스 버팔로스와 1년간 1억 5000만엔+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로써 2005년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편집] 국가 대표 경력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편집] 플레이 스타일

  • 타격 : 이승엽은 전형적인 게스 히터(Guess Hitter)로 알려져 있다. 게스 히터란 타석에 서기 전 미리 어떤 구질, 몇 번째 공을 치겠다고 노리고 들어오는 타자를 말한다. 즉, 노림수가 강한 타자다.[23] 이승엽의 홈런 중 초구 홈런이 많은 것, 또 어이없는 공에 헛스윙 하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일본 진출 초기에는 상대 투수들의 수 싸움에 밀려 이런 게스 히팅이 큰 빛을 보지 못했고, 이승엽은 스타일의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노리지 않은 공이 들어와도 안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스윙 궤적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스윙 스피드의 향상을 통해 이승엽은 점차 일본 투수들에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삼진볼넷 비율에서 삼진 비율이 높을 정도로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는 경향이 독이 된다는 평도 있다.
  • 주루 : 통산 도루에 대해 별로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승엽이 발이 느리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안정되지만 때때로 과감한 베이스 러닝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상에 주자로 나가 있을 때 병살을 방지하는 법이나 타자가 안타를 쳤을 때 항상 어떻게 하면 한 를 더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선수다.
  • 수비 : 상대적으로 타격 기록 때문에 눈에 띄지는 않으나, 이승엽은 삼성 라이온즈 시절부터 견고한 수비 실력을 뽐냈었다. 안정된 포구 및 화려하진 않지만 민첩한 반사 신경으로 평균 이상의 수비 범위를 보여 주며, 특히 베이스 라인 수비가 돋보인다. 일본 진출 후 센트럴 리그 1루수 부문 1천 225회의 연속 무실책 수비 기록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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