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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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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스라엘의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이다. 바르샤바 대학에 다니던 1906년, 스무 살 나이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새 조국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다. 그가 마주한 시온은 황량한 광야의 한 농장이었다. 동료와 함께 물길을 잇고 광야를 개간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한 그는 건국 과정을 주도해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는 등 이스라엘 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그런 그의 삶은 은퇴 후에 더욱 빛났다.

77세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벤구리온은 예루살렘의 안락한 저택을 마다하고 네게브 사막으로 들어갔다. '아침의 땅'이라는 뜻을 가진 옛 유목민 마을 스데 보케르(Sde Boker)에 정착했다.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다. 이스라엘의 국부(國父)가 변변한 의료시설도 없는 사막 마을에서 사는 모양새는 생소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 광야를 회상하며 사막의 노후 생활을 즐거워했다.

"사막은 우리에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여기가 이스라엘 르네상스의 터전이라네. 우리가 이 척박한 땅에 심은 저 나무들을 보게. 내 눈에는 스위스나 스칸디나비아의 울창한 숲보다 아름답다네. 마치 어미가 자식을 키우듯 우리가 물 주고 정성 들여 키웠기에 그렇겠지. 우리 유대인에게 사막은 창조의 공간이라네."
텔 아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있는 벤구리온 초대 총리. /출처=유용원 군사세계
그는 그렇게 사막에서 살았다. 팔순 노인이 낮엔 농사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 총리는 한 번에 딱 한 사람만 할 수 있지만, 사막에 꽃을 피우는 일은 수천, 수만 명이 함께 할 수 있지 않느냐며 사막 사는 기쁨을 칭송했다. 그랬던 그가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을 때, 방 두 칸 허름한 가옥에 그가 남긴 것은 단출했다. 네 평짜리 침실에 덩그러니 놓인 간이 침대 둘, 작은 서재, 가죽 옷 한 벌, 그리고 신발 한 켤레와 평생 애용하던 놋 주전자, 부부 찻잔 한 벌이었다고 한다. 그는 국립묘지 안장을 마다하고 모세의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네게브 사막 한편, 아인 아브닷 협곡에 묻혔다.

벤구리온의 이야기는 미담(美談)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민 사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청년들이 사막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약속의 땅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친 땅에 땀을 뿌려가며 일구는 것이라는 비전에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네게브 사막에 그의 이름을 딴 벤구리온 대학이 세워졌고, 연구 개발의 중심이 되었다.

벤구리온 대학 사막 연구소에서는 지금도 태양광 발전, 환경 및 생태 연구, 수자원 개발 연구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열사의 땅 깊은 곳에 잠긴 물길을 끌어내어 조성한 양어장에서 팔뚝만 한 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장면은 경이롭다.

물론 아랍의 눈에 벤구리온은 자신들 땅을 탈취하고 동족을 학살한 시온주의자의 앞잡이로 비칠 것이다. 점령지를 돌려주고 팔레스타인과 이웃으로 공존하자던 그에 대한 이스라엘 내부의 비판도 만만찮다. 하지만 그의 정치 이력에 관한 판단은 논외로 하자. 적어도 사막을 향해 홀연히 걸어 들어갔던 노(老)정객의 뒷모습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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