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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구소련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음악가 부모 밑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첫 첼로 공개 연주를 했다. 16세 때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배운 피아노와 첼로 외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지휘도 공부했다.
23세 때 소비에트 시절 최고의 영예인 스탈린상을 받으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서방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반체제 인사 솔제니친을 옹호하는 글을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보냈다가 요주의 인물로 찍혀 국내 활동과 해외 연주여행을 제한 받자 74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파리에 머물던 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나 90년 고르바초프 당시 대통령에 의해 복권돼 모스크바로 금의환향했다.
냉전시절 구소련의 예술적 자유를 위해 싸우는 투사로도 잘 알려진 그는 91년 민주화에 저항하는 구소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에 맞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그 앞에서 즉흥 연주를 했고, 99년 다시 그 자리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 기념공연을 했다.
첼리스트로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닉과 깊이를 보였을 뿐 아니라 첼로의 레퍼토리를 넓히는 데 누구보다 힘써 수많은 곡의 작곡을 위촉하고 직접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브리튼, 루토슬라브스키, 펜데레츠키, 뒤티외 등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들이 그를 위해 첼로 곡을 썼다. 한국 첼리스트 장한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그는 수많은 어린 첼리스트들의 정신적 후원자로도 유명하다.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1968년, 볼쇼이극장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지휘하면서부터다. 망명 후 첼로 연주와 지휘를 병행한 그는 77년 워싱턴의 내셔널심포니 음악 감독이 되어 17년간 이끌면서 지휘했고, 세계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객원지휘했다.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다. 최근에는 아내인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 어린이를 위한 건강 재단을 만들어 운영해왔다.
우리집사람과 더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첼리스트입니다.
정확한 기법, 탁월한 곡해석...감상해 보시길...
장한나의 연주...비교해 보시는것도 재미있습니다..
특정 주법에 억매이지 않으면서 요즘 추세에 맞게 빠른 연주...
나름 장점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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