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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맹수의 세상에서 늙은 우두머리가 갈 곳은 없다.
한때 엄청난 기세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젊은 다른 맹수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무리를 떠나야 하는 게 그들의 운명이다. 우두머리도 이를 잘 알고 있기에 마지막엔 적수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조용히 모습을 감춘다.
다소 색깔은 다르지만 강자만이 살아남는 프로야구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일지라도 노장이 돼 기량이 떨어지면 주변의 시선과 대우도 분명 달라진다. 경우에 따라선 신예들의 미래를 위해 힘이 남아있음에도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KIA 타이거즈 이종범(41)은 수년째 이러한 고비를 넘나들고 있는 대표적 노장선수다. 어중간하게 잘했던 선수라면 조용히 묻혀갈 수도 있지만, 워낙 큰 발자국을 남긴 선수이기에 그의 은퇴 여부는 항상 이슈가 되곤 했다. 이종범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어 하루하루를 생사를 넘나드는 늙은 맹수의 기분으로 살고 있다.
◇ 이종범은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갖춘 1번 타자이면서도 어지간한 거포 뺨치는 장타력과 클러치 능력, 여기에 정상급 수비력까지 갖춘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다. ⓒ KIA 타이거즈 |
프로야구사에서 유일하게 ´천재´라 불린 사나이
종목을 막론하고 이따금씩 특정 선수를 가리켜 ´천재´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있다. 남들보다 덜한 노력 혹은 짧은 시기에 큰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에게 전해지는 최고의 찬사다. 어지간히 잘해서는 이 같은 말을 듣기는 어렵다.
이종범은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천재´라는 호칭을 달고 다녔다.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갖춘 1번 타자이면서도 어지간한 거포 뺨치는 장타력과 클러치 능력, 여기에 정상급 수비력까지 갖춘 대표적인 ´5툴 플레이어(five-tool player)´다.
일단 이종범은 그가 맡고 있는 타순에 걸맞게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톱타자의 포스를 내뿜었다. 한 시즌 최다도루(84개)-최다 선두타자 홈런(44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상대 투수들 입장에서 이종범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면승부를 하자니 한방이 무섭고, 내보내면 그라운드를 온통 헤집고 다니는 통에 마땅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30승 투수의 가치를 지녔다는 극찬이 과언이 아니다. 이종범은 단순히 도루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센스를 바탕으로 창의적인 주루플레이에도 능했다. 상대의 아주 작은 틈만 발견되면 지체 없이 내달리는 것은 물론 아웃 타이밍에서도 절묘한 베이스 터치로 상대수비수들의 넋을 나가게 했다.
다른 타자들 같으면 한 베이스로 끝날 것도 이종범이 뛰게 되면 두세 개를 훌쩍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전준호-유지현-정수근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톱타자들도 이종범의 존재로 인해 2~3인자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양준혁 같은 레전드급 거포들마저 인터뷰 등을 통해 이종범 때문에 2인자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푸념했다.
이종범의 가치는 톱타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욕심 많은 그는 찬스에서 유달리 강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큰 경기일수록 승부사적 기질을 활활 불태우며 이상훈-정민철 등 당대의 에이스를 눈물짓게 했다. 최강의 1번 타자이면서도 역시 최고의 클러치히터(clutch hitter)였다.
이종범은 그야말로 ‘사기 캐릭터’였다. 톱타자로서 200안타-100도루-4할을 동시에 사정권에 두고 시즌을 치른 유일한 인물이다. 당시 이종범이 시즌마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욕심을 냈다면 달성했을 수도 있는 기록들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체구에 걸맞지 않는 장타능력도 발군이었다. 특히, 1997년엔 30홈런을 기록하며 이승엽(32개)과 팽팽한 홈런왕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일본에 가지 않고 국내 무대에서 기록에 집중했다면 대부분의 통산기록은 그가 작성했을 것이 확실하다. 역대 최소경기(1,439경기) 1,000득점, 최소경기 500도루(1,439경기) 등이 이를 입증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의 이러한 무시무시한 화력은 유격수 포지션에서 작성됐다는 사실이다. 다른 포지션과 달리 유격수는 수비가 우선시되는 자리다. 2할 대 후반만 쳐도 수준급 유격수로 인정받는 것을 감안할 때 당시 이종범의 존재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정규리그-한국시리즈-올스타전 MVP를 모두 차지한 것을 물론, 국제대회에서도 국가대표로 이름을 떨쳤다. 역대 정상급 ´리드오프(lead-off)´와 유격수 중 유일한 정규리그 MVP 수상자이기도하다.
포수를 포함해 야수의 전 포지션을 경험한 ´멀티 포지션 플레이어(multi-position player)´였다는 점도 이종범의 가치를 더욱 크게 해준다. 그야말로 한국 프로야구사에 이 같은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 올 시즌 이종범은 주로 교체 멤버로 출전하며 타율 0.212 14안타 6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 KIA 타이거즈 |
발톱 빠진 호랑이, 명예로운 은퇴 가능할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근 이종범의 처지는 과거의 명성을 무색케 한다. 최근 수년간의 부진으로 이전에 쌓아놓은 극강의 이미지가 퇴색됐기 때문. 어쩌면 이종범은 2009시즌 우승과 함께 은퇴하는 게 여러 가지 면에서 나았을지도 모른다.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일수록 팬들 뇌리에는 안 좋은 기억이 쌓일 수밖에 없다. 선동열이 지금까지도 최고의 선수로 기억되는 것은 전설적인 기량과 성적도 있지만 좋았을 때 은퇴를 선택, 쇠퇴한 이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도 크다.
아쉽게도 이종범은 몇 번의 좋았던 은퇴 타이밍을 놓쳤다. 여전히 많은 팬들과 관계자들은 그를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꼽지만 전성기를 함께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현재의 모습이 더 기억에 깊이 박힐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종범은 과거 해태시절 ´검은바지의 저승사자´로 수많은 경쟁팀 팬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전과(?)가 있어 엉뚱한 안티 팬들도 적지 않다.
이종범은 현재 교체 멤버로 3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12 14안타 6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전매특허인 도루는 없다. 많은 나이를 감안한다 해도 과연 이게 이종범의 기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종범이 정규시즌 중 명예회복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일부 경기에서 반짝 활약은 가능할지 몰라도 정규타석을 채우면서 좋은 기록을 내기는 어렵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야구팬들은 그가 경기장에서 한 타석을 소화할 때마다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그로 인해 안타까웠던 시절보다는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종범에게 아직 기회는 있다. 그는 단기전에서만큼은 여전히 통할만한 집중력과 경험을 갖춘 선수다. 만약 KIA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면 그의 존재는 정규리그 때와는 또 달라질 수 있다. 과연 이종범은 최근의 좁아진 입지를 극복하고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 황혼의 길목에 들어선 ´야구천재´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데일리안 스포츠 = 김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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