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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중국 광둥(廣東)성 주하이(珠海)에 허름한 식당 하나가 있었다. 주장(珠江)으로 고기잡이 나가는 어민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놓았다. 주인은 부업으로 굴을 끓여 즙을 만들어 팔았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어서 굴이 풍부했다. 하루는 센 불에 굴을 올려놓고 깜빡 잊은 사이 굴 즙이 졸아서 눌어붙었다. 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솥을 열었는데 진한 갈색으로 변한 진득한 굴 즙이 기막힌 향을 풍겼다. 감칠맛도 일품이었다. 중국 요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굴소스는 이렇게 탄생했다. 가게 주인 이름은 리금셩(李錦裳).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이금기(李錦記)’로 지었다. 세계 굴소스 시장을 평정한 식품회사 이금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19세기에 시작해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더욱 커져만 가는 경쟁력을 갖고 있는 이금기의 비결을 리만탓(李文達·82) 이금기그룹 회장을 통해 들여다봤다.
홍콩=박현영 기자
홍콩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타이포(大埔)공업지구에 있는 이금기 본사. 하얀 건물이 반도체 공장처럼 깨끗했다. 창립 100주년이던 1988년 본사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마침 점심 시간이어서 사무동 2층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생선 구이, 탕수육, 채소 볶음과 오리탕이 새하얀 그릇에 담겨 나왔다. 식탁마다 이금기 굴소스와 고추 소스가 놓여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리만탓 그룹 회장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들 데이비드 리 이금기 소스부문 회장과 회사 원로들이 동석했다. 그들 테이블 옆에는 음료수 자판기와 쓰레기통이 놓여 있었다. 식당 안 가장 ‘말석’이었다. 뜻하지 않게 리 그룹 회장과 식당에서 먼저 인사를 나누게 됐다. 식사를 마치고 5층 회장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창업자 리금셩의 손자다.
●3대째 회사를 이끌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굴소스를 발명하면서 창업했다. 아버지 세대에서 기업으로서 기반을 다졌고, 내 세대부터 글로벌 확장을 했다. 나는 1954년 입사해 72년부터 회장을 맡았다. 80년대에 슬하의 4남1녀가 입사해 나를 돕기 시작한 뒤부터 회사가 급성장했다.”
●회사를 맡은 후 중점을 둔 분야는.
“상품을 다양화·현대화·글로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70년대만 해도 상품은 굴소스 한 가지뿐이었다. 지금은 두반장·해선장·XO소스·칠리소스·간장 등 200여 종류의 소스·조미료를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상품 가짓수(SKU)로는 3000가지가 넘는다. 100여 개국에서 팔린다. 회장 취임 당시 18명뿐이던 직원이 지금은 7000명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붉은색은 상서로운 색으로 여겨져 왔다. 붉은색은 불을 상징하는 색이다. 불이 난 가게가 흥한다는 민간의 속설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이금기는 두 차례 불(火)과 인연을 맺는다. 첫째는 센 불에 굴이 졸아 눌어붙는 바람에 굴소스를 발견한 것. 둘째는 1902년 주하이 가게에 큰 불이 났던 것이다. 젓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리금셩은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터전을 마카오로 옮겨 가게를 열었다. 굴소스가 맛나다는 소문이 홍콩까지 퍼졌고, 고객 수요가 많아지자 32년 아예 본사를 홍콩으로 옮겼다. 홍콩을 본거지로 한 덕에 이금기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됐으니 불이 이금기를 흥하게 한 셈이다.
●글로벌 마케팅을 어떻게 했는가.
“이미 30년대에도 이금기 굴소스는 북미 시장에서 팔리고 있었다. 화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초기 이민자들은 미국에 정착해 주로 중식당을 차렸다. 별다른 재주 없이도 남편이 주방을 맡고, 부인이 음식을 나르면 생계는 이을 수 있었으니까. 음식에 감칠맛을 더해주는 굴소스를 식당 주인들이 애용하게 됐다. 빨리 성공하려고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도 많았는데, 자연히 우리 굴소스도 많이 쓰였다.”
이금기 굴소스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90%다. 홍콩 시장에서도 이금기 브랜드가 80~90%를 차지한다. 중국 시장은 통계가 없다. 이금기는 매출액 등 경영지표를 공개하지 않는다.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밝힐 의무가 없다. 거듭된 질문에도 리 회장은 ‘수치’를 언급하지 않았다. 홍보담당 부사장이 “매일 전 세계에서 팔리는 굴소스는 약 100만 병(병당 510g)쯤 된다”고 귀띔했다. 눈 한 번 깜빡일 때마다 10병씩 팔린다는 계산이다. “최근 수 년간 성장률은 두 자릿수”라고 한다.
‘이익을 생각할 때는 그것이 남에게도 미치도록 하라’는 뜻의 사리급인(思利及人)은 리만탓 이금기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그가 직접 쓴 휘호다(사진 위). 이금기의 주요 상품인 굴소스, 두반장, 해선장(왼쪽 사진 왼쪽부터).
●굴소스는 노력이라기보다 우연의 산물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행운이 떨어져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창업주는 그 기회를 잡아 발전시켰다. 최적의 농도를 개발해 상품화하고,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며 성실하게 경영했다.”
회사 복도에는 ‘思利及人(사리급인)’이 적힌 대형 족자가 걸려 있다. 리 회장이 직접 썼다. ‘이익을 생각할 때는 그것이 남에게도 미치도록 하라’, 즉 상대방의 이익을 생각하라는 뜻의 네 글자는 그의 경영철학이다.
“타인의 입장과 감정을 생각해야 그 관계가 성공적일 수 있다. 비즈니스를 할 때에도 장기적인 파트너 관계를 맺으려면 ‘사리급인’이 제일 중요하다. 단기 이익만 생각하면 관계가 오래가지 못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건을 팔고 나서 대금을 갚으라며 유통업자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넘겼다. 그들의 자금 회전에 숨통을 틔워주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리 제품 점유율이 치솟았다.”
리만탓 이금기그룹 회장이 창업자인 조부모 초상화 앞에 섰다. 가운데는 100여 년 전 이금기 굴소스 가게 초창기에 걸었던 간판.
●50년, 90년 된 협력업체도 있다던데.
“가장 오래된 협력업체는 멕시코에서 이금기를 유통하는 곳인데, 함께 일한 지 94년 됐다. 일본의 유통업자는 50년, 홍콩의 유통업자는 53년 됐다. 프리미엄 굴소스 병에 있는 상표를 만든 회사와는 4대째 일하고 있다. 협력업체들도 대를 이어 이금기와 인연을 맺는 것이다.”
●더 많은 이익을 주겠다는 업체가 나타난다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오래된 파트너십의 가치는 신뢰다. 서로를 믿을 수 있어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이다. 신뢰는 오랜 시간이 흘러야만 쌓인다. 각자 시장에서 선도적 위치에 서서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굴소스 병에 있는 상표가 좀 촌스러운 느낌도 있다.
“100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인쇄회사에 의뢰했는데, 그림 그리는 직원들이 상상으로 그렸다고 한다. 우리 가족과 관련된 인물은 아니다.”
●왜 세련된 걸로 바꾸지 않나.
“고객들이 이 상표를 보고 ‘이금기구나’ 하고 기억해 주는 이금기의 상징이다. 그리고 아주 멀쩡한데 왜 바꿔야 하지? 예쁘지 않나? 우리 굴소스 상품 중에서 최고급품인 ‘프리미엄 굴소스’에 상표로 쓰고 있다.”
●123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뭔가.
“퀄리티 있는 상품을 가진 것과 조미료·양념류 사업이라는 본업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좋은 상품은 고객을 도울 뿐 아니라 돈도 벌어다 준다. 퀄리티가 탁월하면 더 비싼 가격에도 상품을 팔 수 있다. 퀄리티·신뢰·평판, 이 세 가지가 있으면 어떤 경쟁도 두렵지 않다.”
●품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여러 단계에서 품질 관리를 한다. 굴소스를 예로 들면 굴 양식장에서부터 완성품이 나올 때까지 4~5 차례 수질·굴·소스의 품질 검사를 한다. 수확 전, 수확 직후, 공장 도착 후, 소스가 절반쯤 만들어졌을 때, 그리고 완성품을 검사한다. 어떤 실수도 나와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모토는 ‘100-1=0’이다. 100번 잘해도 한 번 실수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다는 걸 늘 새기고자 한다.”
이금기 본사에 있는 직원 휴식 공간. 헬리콥터 이·착륙장에서 모티브를 따서 꾸몄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듯 폭넓은 시야를 가지라는 의미다.
●회사를 경영하는 원칙은.
“실용주의, 성실, 기업가 정신이 핵심 가치의 세 축이다. 간혹 현지 유통업자가 ‘물건이 좋지 않다’고 전화를 걸어오면 나는 전액 환불해 줬다. 그렇게 해서 유통업자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자 회사에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은 나와 각을 세우지 않았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파트너에게 늘 공정해야 한다. 그게 상생이다.”
리 그룹 회장은 2008년 미국 뱁슨칼리지가 수여하는 ‘창조적 기업가’상을 받았다.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1996년), 이병철 삼성 창업주(1979년)도 이 상을 수상했다. 리 회장은 “이금기 사전에 ‘현상 유지(守業)’라는 단어는 없다”고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지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기업가는 지금 자리에 안주하려 하면 안 된다. 미래를 내다보고, 계속해서 새로운 비전을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제품을 요리에 응용해 보는 ‘테스트 키친’ 벽에 ‘100-1=0’이라고 씌어 있다. ‘한 번만 잘못해도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직원들이 공유하기 위해서다.
● 이금기를 상장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가족이 함께하기 위해서다. 상장하거나 주식 일부를 팔아 주주가 바뀌면 가족이 함께 나아갈 공동 기반이 없어진다. 기업과 가족의 영속성이 내겐 중요하다.”
●상장하면 회사를 더 키울 수 있지 않나.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회사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게 더 중요하다. 지금은 핵심 사업에만 집중하고 싶다. 일본 기코망 간장은 17대째 가족회사로 남아 있지만 여전히 성공적인 기업이다.”
●앞으로 100년 더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뭔가.
“내게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경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올바른 정책과 전략을 짜야 하는데,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올바른 인재를 뽑는 것이다.”
●사람을 고를 때 무엇을 눈여겨보나.
“충성심을 본다. 회사와 동료에게 충성심이 있으면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힘을 합칠 것이다. 회사에 충성하는 직원은 회사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나는 똑똑하고 일 잘해도 우리 기업 문화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쓰지 않는다.”
이금기그룹은 매년 4월 창립기념일 행사를 연다. 가족, 친척, 직원, 협력업체 파트너 등 세계에서 1000여 명이 홍콩에 모여 제를 올리고 만찬을 한다. 지난해 창립기념일 행사 때 묘역을 참배한 뒤 기념촬영을 했다.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던데.
“건강·가족·일, 이 세 가지의 균형을 이루라고 적극 권장한다. 균형을 갖춰야만 멀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이나 화목한 가정이 없으면 일에서 성공해도, 돈을 많이 벌어도 성공한 인생이 아니다.”
●꿈이 뭔가.
“세계 모든 사람에게 이금기를 맛보게 하는 게 내 꿈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이금기가 있다’를 목표로 삼았는데, 거의 달성해 가고 있다. 중국 음식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 중국 약초로 만든 건강식품을 세계에 보급하는 게 두 번째 꿈이다. 1992년 자회사 ‘난팡이금기(南方李錦記)’를 세워 한방 건강식품을 생산해 판매하고 있다. 두 가지 사명을 달성해 이금기가 진정한 중국 전통 기업으로서 글로벌화에 성공한 사례가 되도록 하겠다.”
●한국에선 한식 세계화 논의가 한창인데 조언해 달라.
“잘 모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전통음식은 있는 그대로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퓨전으로 할 것인가 고민스러울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한국 음식을 개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외 시장에 맞는 맛을 개발해야 한다. 양 방향을 모두 공략해야 한다.”
123년 가족기업 ‘가내 화합이 최고 과제’
가족위원회가 최상위 기구, 첩 두거나 이혼 땐 ‘자격 박탈’
리만탓 회장의 집무실엔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리 회장과 부인, 4남1녀와 그 배우자들, 그리고 손자·손녀까지 이금기가(家) 3, 4, 5대 모두 26명이 찍은 사진이다. 리 회장의 5남매는 모두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이금기에 입사했다. 지금은 차남 데이비드 리가 주력 계열사인 이금기 소스 부문을, 막내 새미 리가 건강식품 회사인 ‘난팡이금기’를 경영하고 있다. 장남 에디 리는 회사 자산 관리, 삼남 찰리 리는 자선재단을 맡고 있다. 딸 엘리자베스 리는 가족위원회를 담당한다. 이들의 자리가 고정된 건 아니다. 2년마다 순환하도록 했다. 수년 전에는 장남 에디 리가 소스 부문 회장이었다.
이금기는 가족이 100% 지분을 소유한 가족회사다. 여느 가족기업과 다른 이금기만의 독특한 가족경영 방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리 회장은 2002년 이금기의 최상위 기구로 ‘가족위원회’를 만들었다. 가족 전원이 멤버다. 여기서는 경영에 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가족 간 정을 나누고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려는 목적이다. 전 가족은 3개월마다 3박4일간 시간을 함께 보낸다. 골프도 치고, 스키도 타며, 티셔츠를 맞춰 입고 여행을 한다.
가족기업은 가족과 사업이 연동해 있다 보니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면 사업 자체가 흔들린다. 리 회장은 이를 두 차례나 목격했다. 아버지 세대와 자기 세대에서 각각 형제 간 분쟁을 겪었다. 법정 싸움으로 번지고, 회사가 파산 지경에까지 갔다. 가족기업에는 가족 간 인화(人和)가 최고의 과제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그가 무엇보다 인화에 신경 쓰는 이유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가정이 화목해야 번영한다는 의미의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을 늘 강조한다”고 했다.
가족위원회에서 제정한 ‘가족 헌법’은 모두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다. 5대 구성원부터는 다른 기업이나 기관에서 3~5년의 경험을 쌓아야 이금기에 입사할 수 있다. 채용 절차와 입사 후 고과는 일반 직원과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것도 가족 헌법에 명시돼 있다. 헌법과 별도로 리 회장은 다섯 자녀에게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내렸다. 첫째, 결혼을 늦게 하지 말 것. 둘째, 이혼하지 말 것. 셋째, ‘첩’을 두면 안 된다는 것. 특히 이혼과 ‘첩’은 엄격히 금했다. 두 가지를 어기면 가족위원회 멤버 자격을 박탈당한다.
리 회장은 자녀를 장례식에 자주 데려갔다. 장례식장에서는 망자의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고, 가족 간 갈등과 같은 복잡한 인생사도 만날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일생의 모든 행위는 마지막 관 뚜껑을 덮을 때 책임질 수 있도록 하라’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j칵테일 >> 단골 이발소 문 닫자 의자 몽땅 사와
리만탓 회장은 올해 82세다. 동갑인 부인 초이메이링 여사와 2009년 ‘결혼 55주년과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산수연(傘壽宴)’을 열었다. 리 회장의 건강 비법은 수영과 목욕이다. 매일 아침 수영을 하고, 찬물과 더운물에 번갈아 들어가며 사우나를 한다. 운동을 마치고는 홍콩 시내에 있는 오래된 찻집에서 친구들을 만나 얌차(飮茶·차와 함께 딤섬을 먹는 것)를 한다고 한다. 굴소스와 한방 건강식품을 많이 먹어서 건강한 것 아니냐며 직원들은 그를 ‘살아 있는 광고’라고 부른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열정적이었다. 답변뿐 아니라 액션도. 인터뷰 도중 갑자기 일어나 사라지기를 여러 차례. 집무실 뒤편 창고를 뒤져 굴소스 병이나 두반장 병을 들고 나오는가 하면, 자회사에서 만든 한방 면역증강제를 꺼내와 마시라고 권하기도 했다. 집무실 밖 복도에는 이발 의자 8개가 줄지어 있었다. 반세기 가까이 다닌 단골 이발소가 문을 닫게 되자 그곳 이발 의자를 몽땅 사왔다. “이 의자가 얼마나 편한데…. 아쉬워서.” 소탈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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