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st Steve Jobs Tape
A treasure trove of unearthed interviews, conducted by the writer who knew him best, reveals how Jobs's ultimate success at Apple can be traced directly to his so-called wilderness years.
BY BRENT SCHLENDER | APRIL 17, 2012
ALL ILLUSTRATIONS DRAWN ON IPAD BY JORGE COLOMBO
스티브 잡스의 인생을 오페라로 올린다면 그의 오페라는 3막으로 이뤄진 비극이 될 것이다.1막, 애플 컴퓨터의 창립과 PC 산업의 발명. 2막, 광야 시대. 3막, 환희의 귀환과 비극적인 사망.
1막은 철없는 젊은 시절과 천재의 성급함, 그리고 갑자기 자신의 왕국에서 쫓겨난 일에 대한 흥미진진한 코메디가 될 것이다. 마지막 3막은 가정을 좋아하는 대머리의 하이테크 록스타가 되돌아와 애플을 자기 스스로의 기대 이상으로 뒤바꿔 놓았고, 그의 오리지날 발명은 기적적으로 디지탈 세상을 제일 거대하게 뒤바꾼 작품이 됐지만, 불치병에 걸려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지막 불빛을 태우고 떠나간 아이러니에 대한 내용이 될 것이다. 두 막 모두 한 악당의 이야기로서 셰익스피어급의 연민을 자아내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2막은 어떨까? 2막은 어느 면으로 보나 별개의 이야기이다. 사실 2막의 제목, 광야 시대에 이뤄진 일들은 제목 이상의 것이었다. 잡스라면, 그가 애플에 있던 시기만이 중요하다 여기는 저널리스트나 전기작가들이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애플에 없었던 틈새 시기라 편리하게 쓴 제목이, 실제 그 시기를 평가절하한다고 여길 것이다. 사실 그 시기는 잡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였으며, 아마도 그가 제일 행복했던 시기일 것이다. 마침내 정착하여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 시기이니 말이다. 그는 인내심의 가치와 인내심을 잃었을 때 잃지 않은 채 하는 법도 배웠다. 뭣보다 그 시기동안 그가 이끌었던 회사 두 곳에서 이룬 일이 중요하다. 넥스트와 픽사 덕분에 그는 사나이이자 지도자가 됐으며, 그로 인해 복귀 이후의 애플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리드 대학교를 맨발 차림으로 자퇴했거나 인도를 여행했던 것만큼이나 비지니스스쿨에 들어갔던 것 또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모든 면에서 2막은 픽사 영화의 스토리라인이라 부를 수도 있다. 토이스토리에서 업!에 이르기까지 픽사 스튜디오의 성공 요인을 존 래서터는 간단히 표현한 바 있다. 같은 맥락이다. "주인공이 더 나은 쪽으로 어떻게 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필자는 1985년 이래 포천지와 월스트리트 저널지에서 잡스를 다뤄 왔지만 필자조차도 이 "잃어버린"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었다. 하지만 지난 가을 그의 서거 이후, 창고를 뒤지다가 30여개의 인터뷰 테이프를 발견했다(어떤 건 세 시간 분량이기도 했다). 지난 25년간 그와 함께 해왔던 것들이었다(거기서 뽑아낸 내용이 이번 기사에 흩어져 있다). 한 번도 다시 재생시켜본 적이 없는 테이프도 많았고 몇 가지는 이번 기사를 작성하기 전까지 한 번도 안 들어본 것도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부엌으로 그의 아이들이 들이닥쳐서 중단됐던 것도 있었고, 반응이 두려워서 잡스 스스로가 정지 버튼을 눌렀던 것도 있었다. 뭔가 뽑아낼 것이 있을지 알기 위해 들어보니 특히 그 시기에 했던 인터뷰들이 와닿는 것들이 많았다.
2막 시기의 교훈은 정말 강력하다. 잡스는 관리자이자 보스로서 성숙해졌다. 파트너쉽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배우고 태생적인 고집을 생산적인 인내심으로 바꿀 줄도 알게 됐다. 말하자면 그는 기업 건축가가 됐다. 한 사업의 골조를 세우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의미다. 물론 그는 실제 빌딩 골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항상 많았다. 그는 헐리우드에 들어가 협상법을 마스터하고 픽사의 예술가들은 물론, 크리에이티브 영역의 인재들을 성공적으로 다스리는 법도 배웠다. 마지막 10년간 애플에서 끊임 없이 히트작을 내놓을 수 있던 융통성이야말로 그가 개발한 제일 중요한 성질일 것이다. 이 모든 점들이 바로 모두들 제일 실망스러운 시기라 일컫는 그 시기에 만들어졌다.
11년은 특히 장수를 못 이룬 한 인생에 있어서 꽤 긴 시기이다. 더구나 크리에이티브 쪽의 사람들은 30~40대에 절정을 이룰 때가 종종 있다. 지난 14년간 애플에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잃어버린" 시기를 잊어버리기는 쉽지만, 사실 그 시기야말로 잡스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테이프를 몇 시간이고 다시 듣노라면 그가 제일 생산적이었던 시기가 아무래도 그 때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스티브 잡스는 1985년 애플로부터의 축출 이후 광야를 목적 없이 떠돈 적이 없었다. 광야를 떠도는 행복한 야영객은 아니었지만 그는 참고 또 참아야 할 이유가 많았다. 그를 내쫓은 이들에 대해 복수하고 그가 한 번의 운으로 세상에 자신을 알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며칠 안 있어서 그는 애플 주식을 딱 한 주만 남기고 모두 팔아 7천만 달러 정도를 확보하였다. 이 돈으로 그는 넥스트라 불리는 컴퓨터 회사를 창립했다. 넥스트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컴퓨터로 고등교육계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넥스트는 더 나은 애플을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을 하려는 도박이었다.
Steve Jobs drove a hard bargain with George Lucas, buying the group that became Pixar for a mere $5 million. Lucas never regretted the sale, however. In fact, much of Pixar's postproduction was done at his studios on Skywalker Ranch.
애플을 떠나 있던 세월동안 그는 애플에 대해 좋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 그는 애플 CEO 존 스컬리가 애플의 문화에 어떻게 "독을 퍼뜨렸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곤 했었다. 세월이 흐르고 애플의 빛도 어두워졌지만 잡스의 공격은 한층 더 정확해졌다. 1990년대 중반에 그가 했던 말이다. "지금 당장 보면 애플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마녀가 '녹고 있어, 녹고 있어.'라 부르짖는 것과 같습니다. 다 틀렸어요. 애플은 이제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못 살릴걸요. 산업디자인에 돈 좀 크게 써서 자기의 히피적인 요소를 다시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들은 아멜리오를 (CEO로) 골라버렸죠. 나이키가 Kinney 신발 사장을 고용한 꼴입니다."
잡스는 넥스트에서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 작정이었다. 그것도 거대한 투자를 이끌어내서 하려 했었다. 실제로 로스 페로의 투자자금과 일본의 프린터 업체인 캐논, 그리고 카네기멜론 대학교로부터 투자 자금 1억 달러를 유치한 잡스는 캘리포니아 프레먼트의 놀라운 자동화된 공장에서 넥스트를 만들려 했다. 이 공장의 모든 설비는 검정색과 흰색,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공장에서마저 스타일을 추구하려 했던 것이다. 회사 사무실 또한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넥스트 본사는 오늘날 애플스토어의 인테리어를 방불케 했었다. 공중에 떠 있는 계단도 그 시절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는 또한 그가 "Open Corporation"이라 부르는 혁명적인 조직도 만들려 했다. 그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자.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시죠. 자기 몸을 스스로 보면 세포들이 모두 다 기능별로 특화돼 있지만, 세포 하나 하나가 신체 자체의 마스터플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우리 회사는 직원 한 명 한 명이 전체 마스터플랜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회사가 될 겁니다. 직원 모두가 다 그걸 안다면, 크고 작은 수많은 결정을 더 낫게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과감한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잡스가 광야에 있던 시절을 비지니스스쿨의 응용 수업과정으로 본다면, 넥스트의 창립은 자기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세상에 그걸 보여주려 하는 학생이 회사를 만들 때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수업으로 볼 수 있다. 잡스는 사실 모든 세세한 부분에서 틀리기도 했다. "Open Corporation"은 실질적으로 재앙적인 실패였다. 대표적인 실패점은 직원 개개인의 봉급이 모두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번은 모든 봉급을 똑같이 하려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 일은 당연히 이뤄지지 않았다. 핵심 인력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종류의 별도 계약을 체결해야 했으니 말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잡스의 사업계획 전체가 틀렸었다. 넥스트가 소비자에게 뭔가 보여 주려면 2년도 더 기다려야 했다. 넥스트 컴퓨터가 마침내 등장했을 때는 심각한 마케팅을 벌이기에 너무 고가였다. 결국 잡스는 넥스트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와 그의 엔지니어링 팀이 이룬 일은 실패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직원 대부분을 해고하고 회사의 목표를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변경했다. 일단 넥스트의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을 인텔용으로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조치였다. 넥스트는 또한 웹오브젝트라 불리는 기발한 개발환경을 만들기도 했으며, 이 웹오브젝트는 베스트-셀러 프로그램에 오를 수 있었다.
잡스는 웹오브젝트가 나중에 애플 온라인스토어나 아이튠스를 만드는 핵심이 될지 몰랐다. 아니, 넥스트스텝이 애플로 되돌아갈 표가 될지도 몰랐을 것이다. 넥스트의 길은 언제나 튼튼했다. 복수심으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뭔가 의도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도 그것은 좋은 일이었다.
잡스가 만든 세 회사 중, 픽사는 자신의 성격을 조직적인 표현으로 그러낸 가장 순수한 회사였다. 넥스트가 잡스의 영혼과 복수심의 산물이었다면, 픽사는 순수한 애정의 산물이었다.
픽사 이야기는 잡스가 애플을 떠나기 전부터 시작됐었다. 1985년 초, 애플 펠로우인 앨런 케이는 캘리포니아 샌러펠에 있던 컴퓨터 그래픽 그룹(CG)이라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그룹은 조지 루카스가 자신의 스카이워커 랜치 스튜디오를 위해 만들었던 영화제작 퍼즐의 조각을 잘못 끼워 맞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CG에 모인 25명 정도의 엔지니어 중에는 젊은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 존 래서터도 들어가 있었다. 루카스가 이혼의 여파로 CG를 매각하려는 와중에서도, 래서터는 계속 같이 작업을 하고 싶어 했었다.
잡스의 방문견학은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CG의 리더였던 에드 캣멀은 잡스에게, 래서터가 만든 짧은 데모 영상을 보여줬다. 캣멀은 프로그래머도,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이너도 아니었지만, 디즈니를 떠난 능력 있는 애니메이터였다. 덕분에 그는 루카스를 설득해서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영상 자체에 볼거리는 별로 없었지만 그 영상은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닌 컴퓨터가 만들어낸 3D였다. 캣멀은 잡스에게 이야기꾼의 익살을 보여주는 영상을 보여줬다.
깊은 인상을 받은 잡스는 일단 CG 인수를 위해 애플 이사진을 설득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잡스의 말이다. "CG 친구들은 그래픽에서 우리를 한참 앞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최고였죠. 본능적으로 이 친구들이 매우 중요해지리라 느꼈습니다." 애플로부터 쫓겨난 이후 잡스는 루카스에게 가서 값을 깎아냈다. 그는 그룹 자산을 500만 달러에 매입하고 회사 운영을 위해 500만 달러를 추가적으로 투입했고, 이름을 픽사로 바꾸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인수가는 터무니 없이 적었다. 그래도 1985년 당시 픽사가 넥스트를 능가하리라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잡스조차도 말이다. 그는 픽사의 애니메이터와 엔지니어들을 데려다 놓고 그럴싸한 것을 전혀 만들지 않았다. 픽사 직원들은 수 년동안 중고 가구를 갖다 놓은 촌스런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금 잡스가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사항이 실제로 구체화되진 않고 말았다. 잡스는 처음에 고성능 컴퓨터 하드웨어를 조달하기 위해 넥스트를 세웠었다. 픽사의 목표는 두 가지, 헐리우드 제작사용 특수효과와 전문 의료 이미지였다. 그러나 1989년, 픽사는 화강암 모양으로 생긴 13만 5천 달러 짜리 픽사 이미지 컴퓨터를 수 백 대 판매했을 뿐이었다. 뭐라도 하려면 값비싼 엔지니어링용 웍스테이션을 추가적으로 맞춰줘야 했던 컴퓨터였다.
1990년, 중대한 전략적인 결정이 일어났다. 래서터와 캣멀은 잡스에게 컴퓨터 애니메이션 텔레비전 광고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어쩌면 만화를 만들어서 팔 수도 있을 일이었다! 잡스는 그들의 제안에 홀딱 반했다. 그들은 언제나 잡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컴퓨터를 사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서 애니메이션 사업 모델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까? 잡스는 그 기회에 모든 것을 한 군데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애플에 복귀했을 때에도 다짐했던, 모든 것을 뒤바꾸겠다는 본능이었다.
1991년, 잡스는 픽사 직원 다수를 해고하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발표했다. 한 번에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하나만을 하도록 조직을 바꾸겠다는 내용이었다. 잡스의 말이다. "모두가 같이 하도록 했어요. '원래 우리는 콘텐트 회사다,라는 사항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두들 콘텐트 회사를 하도록 하자 이거였습니다. 애당초에 픽사를 세운 이유도 그거였어요. 당신들이 여기 있는 이유도 그겁니다. 그러니까, 합시다. 당연히 위험도는 높지만 보상은 훨씬 클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이잖아요." 당시 잡스와 픽사 CFO였던 로렌스 레비는 애니메이션 사업에 대한 모든 사항을 배우기 시작했다. 만화를 만들기로 했다면, 정말 올바르게 해야 할 것이었다.
픽사 내의 변동은 잡스 사생활에 있어서의 지각변동과 시기가 같았다. 로렌 파웰과의 연애가 꽃을 피운 것이다. 1991년,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교 비지니스스쿨 비공식 강의에서 만난 이후 로렌은 잡스의 아이를 밴 채 결혼을 했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와니 호텔에서 있었던 결혼식 주례는 스님이 해줬다.
잡스는 결혼을 할만한 타입이었던 적이 없었고 1978년 혼외정사로 낳은 첫째 딸인 리사에 대한 책임감도 별로 보인 적이 없었다. 리사의 이름을 따서 컴퓨터를 하나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에 리사의 생물학적 아버지임을 부인했었다. 어릴 때부터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이며 교묘하게 주변을 다루던 그는 종종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처럼 행동했었다.
물론 로렌과 만났다고 하여 그의 성격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이기적인 방식이 부드러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특히 리드와 에린, 이브가 1991년, 1995년, 1998년에 차례로 태어난 이후로 더욱 더 그러했다. 새로 부모가 된 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잡스는 가족의 기쁨을 세상 처음 발견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말 그대로 집에 가까이 머물렀고 Palo Alto Whole Foods 대각선 거리의 빌딩을 아예 사무실로 만들어서 통근거리를 자전거로 다닐 수 있게 하기도 했다. (애플 복귀 이후로는 그 사무실을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필자의 사무실은 한 블럭 떨어져 있었고 가끔 그와 산책을 같이 했다(그러면 누군가 우리를 따라붙곤 했었다). 그는 항상 걸을 때 더 잘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 시절 잡스의 명성은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수퍼마켓에서 비틀즈 일원 중 한 명을 만나는 것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잡스가 오건 말건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필자는 그가 혼자 있을 때 그에게 접근하는 사람 중 하나였고 로렌의 생일선물을 위해 새 자전거를 구입할 때도 그와 같이 갔었다. 지금 말하는 시기는 여러분이 인터넷을 활용하여 학교 숙제를 하기 전 얘기이기에 인터넷을 사용할 순 없었다. 그래도 잡스는 조사를 다 마쳤고, 살만한 자전거가 별로 없었다. 우리는 Palo Alto Bicycles를 들어간지 10분만에 나와버렸다. 잡스는 오랜 기간 비서였던 안드레아를 거론했다. "안드레아한테 이런 일을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가족 선물은 제가 사는 것이 좋죠."
애플로 복귀한 이후에도 잡스는 집에서 시간 보내기를 더 좋아했었다. 그렇다고 워커홀릭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수 년간 우리는 아이챗 친구였으며, 집의 컴퓨터로 일을 할 때 그의 이름이 친구 창에 뜨곤 했었고, 자정 이후에도 커져 있을 때가 흔했다. 우린 종종 화상 채팅을 했고, 초저녁에 채팅을 할 때면 아이들 중 하나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때도 많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잡스에게 가정이 생긴 것은 픽사에세도 정말 좋은 행운이었다. 잡스는 자신을 주된 고객으로 여길 때, 마케터로서 그리고 사업 지도자로서 제일 효율적이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에서 그가 원했던 것은 그 스스로를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그의 아이를 위해서였을까? 잡스가 생각했던 유일한 시장조사용 의문이 그것 하나였다. 컴퓨터 제품을 위해, 그는 언제나 위대한 생산 가치와 디자인을 요구했었다. 픽사가 생산한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래서터와 캣멀은 감정이입된 후원자에게 더 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Running Pixar was a pleasure for Jobs. He loved to come down to the studios to watch talented actors like Tom Hanks voice their lines. He deeply admired the company's chief creative officer, John Lasseter, who directed Toy Story and A Bug's Life.
광고와 단편 제작을 허용하기로 한 1990년의 결정 직후, 잡스는 마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2,600만 달러 어치의 마케팅 및 배급 협상을 디즈니와 체결한 것이다. 디즈니는 장편용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들기에 충분한 자금을 대줬다. 디즈니는 원래 픽사의 고객이어서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을 관리하는 소프트웨어도 픽사로부터 라이센스받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CEO였던 마이클 아이즈너와 애니메이션 책임자인 제프리 카첸버그 모두 픽사의 기술이 탄탄하고 독특하다는 사실과 함께, 래서터가 새로운 세대의 애니메이터로서 천재적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잡스는 아이즈너와 카첸버그에 대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들은 기술에 대해 감사하지 않더군요. 실수입니다. 돈이라면 다 되는줄 알아요. 생각이 없는 것이지." 한 번은 그가 받은 느낌에 대해 격분한 적도 있었다. IBM과 넥스트 사이의 파트너쉽에 대해 필자가 그에게 물어봤을 때였다. "IBM 윗대가리들은 컴퓨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아무 것도. 전혀. 디즈니 우두머리들은 그래도 좋은 영화가 뭔지 아주 잘 알고 있더만."
"픽사가 그들을 위해 뭘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던 잡스도 카첸버그와 아이즈너가 픽사를 어느정도 살려냈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다. 잡스는 픽사의 기술이 당시 손으로 그리던 애니메이션 사업모델을 혁명적으로 바꾸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픽사와 디즈니 간의 끈끈한 관계를 알아냈다. "픽사를 위해 제가 했던 가장 큰 일이었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이 분명 많기는 하지만 모두의 관심사는 역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에서 공포심을 없애는 방법이 한 가지 있어요. 파트너의 가치가 당신의 가치와 같다는 점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신경쓰는 것은 상대방도 신경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포심이 사라지고 훌륭한 관계를 맺을 수 있죠. 기업 간의 관계이건 결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그 후 그는 훌륭한 영화를 (다수) 만들기 위한 조직 디자인에 들어갔다. 그는 헐리우드가 많은 점을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영화를 어떻게들 만드는지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기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건 집시들이더군요. 영화를 만들고 나면 다시 흩어지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기업을 만들 때입니다. 영화 딱 한 편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이번에는 "오픈" 기업이라는 변덕스러운 논의가 없었다. 그가 해 준 말이다. "인센티브 구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뭘 시키려면 그들에게 줄 것을 깊게 생각해 봐야 해요. 여러가지 인센티브 구조가 있기는 한데,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낼 때가 아주 많습니다. 픽사의 경우는 모두들 회사를 만들 동기를 갖고 있어요. 영화 일을 하건 비디오 제품 작업을 하건, CD-ROM 일을 하건 간에 말이죠.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인재들이 모여서 뭘 하건 간에, 우리는 전체적으로, 그들이 픽사를 성공시키기를 원합니다."
실리콘밸리의 가치와 헐리우드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완전히 혼합해낼 수 있을까? 픽사의 보상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픽사는 소프트웨어 천재급과 동일한 보상을 애니메이터에게 준다. (카첸버그가 드림웍스를 시작할 때 그 보상액도 상승했다.) 잡스는 애니메이터와 엔지니어라는 두 가지 종류의 인재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둘 다 동등하게 가치를 줍니다. 한 쪽을 더 높게 해 줘야 하잖냐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평가하고 급료를 주며 똑같이 취급하기를 바래요. 이 결정은 매우 초창기 때부터 했습니다. 사실 에드 캣멀이 그 결정을 내렸죠. 항상 그럴 겁니다. 픽사의 핵심 가치이니까요."
이러한 결정은 픽사의 미래 성공을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픽사의 첫 영화가 1995년 휴가기간에 나와야 한다는 디즈니의 방침에 놀라기는 했지만, 잡스의 팀은 준비가 돼 있었다. 그래서 나온 영화가 토이스토리였고, 잡스는 세 편의 영화를 더 찍기로 디즈니와 재협상을 했다. 픽사는 토이스토리의 성공적인 데뷔 열흘 후, 주식시장에 상장됐고 시가를 거의 1억 달러 더 끌어 올렸다.
그 이후는 마치 비디오의 "뒤로" 버튼을 누른 것과 같았다. 남은 인생동안 잡스는 픽사 외에 다른 것을 즐기지 않았다. 이제 중고 가구를 버리고 본사 빌딩도 캘리포니아 에므리빌에 새로 지었다. 넥스트 본사를 지을 때보다도 훨씬 더 몰입해 있었다. 이번에는 그와 자신의 팀이 해낸 것이기 때문이었다. 헐리우드 스타일에 오래 된 벽돌공장식의 건물은 애니메이터와 프로그래머들에게 제격이었고, 톰 행크스와 엘런 드제너러스, 오언 윌슨 외 픽사 캐릭터의 목소리를 맡은 헐리우드 스타들에게도 어울렸다. 건물용으로 만든 벽돌은 12가지 음영을 갖고 있었다. 만약 색상이 골고루 분포돼 있지 않으면 잡스는 제작을 다시 명했다. 그는 건설 현장을 자주 방문했는데 심지어는 밤에도 건설현장에 가서 기어 오르곤 했었다. 그 때는 보안 요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또한 픽사 직원용 픽사대학교도 만들었다. 훌륭한 엔지니어와 아티스트, 똑똑한 재무 전문가들이 수업을 열어서 온갖 종류의 주제를 마루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동료들이 이룬 일에 대해 더 잘 감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비쥬얼아트와 춤, 컴퓨터 프로그래밍, 외국어, 연극, 수학, 창작 글쓰기, 심지어 회계학도 수업에 들어 있었다. 잡스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전세계에서 제일 쿨한 회사일 겁니다."
잡스에게 모든 기쁨을 준 곳이 픽사라면, 잡스에게 애플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준 회사는 넥스트였다. IBM과의 협력으로 맥용 소프트웨어 아키텍쳐를 새로이 개발하는데 실패한 애플은 1996년 거의 죽은 상태였다. 넥스트에게는 강력하고 현대적인 운영체제와 매우 설득력이 높은 이야기꾼도 있었다. 그는 애플 CEO인 아멜리오를 설득하여 넥스트를 애플의 구세주로 만들었다. 1996년 말, 잡스는 4억 달러를 받고 넥스트를 애플에 팔았고 그는 이 돈을 페로와 캐논 등 넥스트 초기 투자자들에게 갚는데 썼다. 그로부터 6개월이 채 안 되어 잡스는 애플의 "iCEO"에 올라섰다. 이 때의 i는 상당히 기만적인 "임시"의 의미였다.
When Jobs returned to Apple in 1997, one of the first things he did was trim the product line, focusing employees on four clear projects. He liked to explain his strategy while drawing on a whiteboard, like a professor of management.
그 이후는 애플의 현재 이야기가 됐다. 11년간의 비지니스스쿨과 그간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나타난 사내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가 픽사와 넥스트를 시작했을 때에도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애플에 처음 복귀했을 때 저지른 실수도 있었다. 그는 애플의 사업이 언제나 컴퓨터 판매가 되리라 여겼었다. 그는 "정보 고속도로"라 불리던 인터넷에 대해 주로 사업적인 관심만 보였을 뿐이다. 그는 컴퓨터 네트워크가 비디오도 전송하리라는 아이디어를 묵살했었다.
그러나 넥스트와 픽사에서 보낸 어려웠던 시절은 그에게 회사의 재정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가르쳐줬고, 덕분에 첫 수 년동안 운영을 잘 해낼 수 있었다. 그래도 당시 애플은 몇 가지 제품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새로이 발견한 원칙으로 그는 애플의 제품군을 빠르게 정리했다. 픽사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회사를 몇 가지 프로젝트에 집중시켰는데, 이런 방식은 기술회사로서는 한 번도 없었던 방식이었다. 일 년에 한 번씩 훌륭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내놓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잡스는 히트작을 차례로 내놓도록 조직을 바꿨고 각 제품을 애플의 소비자용 디지탈 허브에 묶이도록 하고 매번 더 강력해지도록 했다. 10여년에 걸친 애플의 아이맥과 파워북, 아이포드, 아이튠스, 아이폰, 아이패드를 픽사의 토이스토리,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인크레더블, 월-이, 업!과 나란히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로 위대한 회사만이 최고로 위대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잡스가 배운 교훈이다.
잡스는 픽사에서 인재를 다루는 방식도 배웠다. 잡스는 필자에게 픽사의 동료들과 넥스트의 동료들에 대해 다르게 얘기하곤 했었다. 그가 애플로 복귀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고 간부진에 대해 그는 예외도 없지 않았지만 똑같은 부드러운 말로 묘사했다. 이를테면 픽사에서 애니메이터와 프로그래머들을 한데 모았던 것처럼 그는 애플의 디자이너와 기술자들을 통합시켰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팀을 만들었으며, 그 중에는 픽사의 래서터와 비견할만한 조나단 아이브가 있었다. 그의 말이다. "너무나 많이 하드웨어 제품을 만들어 가지고 조니와 서로 쳐다보면서 '더 이상 좋게 만들 방법을 모르겠다, 더 이상 몰라'라는 말을 할 정도였죠. 뭐 항상 그랬어요. 하지만 다시금 다르게 깨닫습니다. 좀 있으면 또 새로운 것이 생각나서 '아니 우리가 어떻게 이따위 것을 할 수 있었지?'라는 말이 나오죠."
지난 달, 그의 이 말을 다시 들으면서 뭔가 다른 생각이 났다. 애플의 성공에 있어서 직관과 융통성의 결합이 중요했다는 생각이었다. 잡스가 충동적일 때가 있기는 해도 그는 언제나 체계적이었다. 그런 성격은 다방면에 취향을 가진 독학자에게 어울리는 성격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에 곧바로 대처하기 위한 집착, 혹은 올바르게 해낼 때까지 아이디어 한 가지를 끝까지 파고들게 하는 것도 다 그런 성격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세한 부분은 틀리다 하더라도 큰 그림에 있어서 그가 종종 옳았을 것이다. Open Corporation은 옳지만 급여 공개같은 세세한 부분은 틀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직원 하나 하나가 회사의 목표를 이해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10년도 넘게 애플이 성공하고 다른 조직 대부분이 실패한 이유이다. 휴대폰과 휴대기기로의 진입에 대해 잡스의 생각이 처음에 틀렸다면, 격동하는 디지탈 세상의 중심에 컴퓨터가 있다는 그의 큰 그림은 옳았다. 그래서 애플은 아이포드 이후, 원래 계획에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아이튠스 스토어를 내놓았다. 디지탈 기기의 "스위스 군용 칼"에 대한 잡스의 일축에도 불구하고 나온 훌륭한 아이폰도 마찬가지다.
In the months before the official launch of the iPod, Jobs loved testing out demo versions. But he couldn't do so in public because he didn't want anyone asking about his new device. One place where he could experiment was the corporate jet.
헐리우드의 경험에서 그가 배운 큰 교훈이 한 가지 더 있다. 제품보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이 더 잘 기억한다는 사실이다. 필자에게 해 준 말이다. "우리가 20년도 넘게 갈고 닦은 기술은 이제 화석이 될 겁니다만, 백설공주가 재발매됐을 때[2001년 DVD로 재발매됐다], 가서 백설공주를 사온 가정이 2,800만 명이에요. 백설공주가 언제 나왔습니까? 60년 전이에요. 제 아들도 그걸 보고 좋아하더군요. 앞으로 60년 후에도 매킨토시를 사람들이 좋아하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깨달은 이후, 잡스는 자기 스스로의 인생과 업적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억을 돕기 위해 로렌은 잡스를 정말 잘 알고싶다 여기게 된 계기를 말해줬었다. 다름 아닌 잡스의 "완전히 형성된 미학적 감각" 때문이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어째서 그것을 좋아하는지 정확히 말해줄 수 있을 때까지 잡스는 분석을 했었다. 잡스는 언제나 건축이야말로 한 개인의 미감을 진정 표현해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건축은 인생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존재였다. 그가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곳이 쿠퍼티노 시의회였다는 사실도 우연이 아니다. 그 때 그는 4층 짜리, 지름 반-마일 도너츠처럼 생긴 "우주선" 형태의 미래 애플 본사를 선보였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잡스는 자신의 공식적인 이야기도 자신의 기대에 부합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의 전기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월터 아이작슨을 불러서 자기 이야기를 해줬다. 그런 위인들처럼 잡스는 자신의 이야기가 시대를 뛰어넘기를,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발견을 이뤄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잃어버린" 세월, 즉 "광야"에서 알게 된 교훈이야말로 잡스 인생에서 제일 고무적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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