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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

44년 헌신 수녀님 “나의 첫 봉사는 버스안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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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서울시 명예시민 된 독일인 마리아 베르틸데 수녀

“몸은 독일인이지만 마음은 항상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한국인으로 인정해 주니 감격스럽다.”

44년간 한국의 어려운 이웃과 장애인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서울시 명예시민이 된 독일인 마리아 베르틸데 하르트만 수녀(73·본명 메히틸드 하르트만). 인천 계양구 노틀담 수녀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만큼 해맑았다. 한국말도 유창했다.

1967년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후 평생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해 온 그는 “격변기의 한국이라 어려운 상황에서 봉사를 시작했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힘든 것도 모르고 기쁘게 봉사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다. 부모의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허락을 얻고 1955년 노틀담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의 나이 29살,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외에는 아는 것 하나 없는 낯선 땅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한국에 오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처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회에서 2년 가까이 한국말을 배우던 그때, 제일 먼저 마음과 눈이 간 데는 근무시간 초과, 적은 보수,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버스 안내양들이었다.

“내가 한국에 도착한 그 당시의 버스안내양 대부분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객지로 온 아이들이었어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일하는 그들을 꼭 도와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는 수녀원에서 버스안내양을 위해 송년잔치를 베푸는 것을 시작으로 주 2~3회 버스안내양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동료 수녀들과 버스 회사를 순회하며, 안내양들의 숙소와 그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시간을 가졌다. 그들을 수녀원으로 초대해 재봉질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땅의 대부분 사람들이 먹고살기가 힘겨운 시절이었지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둘러보면 온통 굶주리고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잘 곳도 없는 사람들뿐이었어요.”

1970년대 초반 부산에서 가장 가난한 12구역인 부민동의 새로운 작은 공동체 책임을 맡게 됐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엄마들을 보면서 아이들을 돌봐줄 유치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수녀원 응접실에 ‘특수 유치원’을 열었다. 지금은 건물을 신축해 5개반을 운영하는 어엿한 유치원으로 성장했다.

88서울장애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장애인에게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지체장애인 재활센터를 열어 동료 수녀, 자원봉사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장애인들을 챙겨주고 세상의 떳떳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자부심을 키워주고 있다.

“장애인은 그저 어려운 때를 겪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운 시기를 만나 장애를 겪게 마련이지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여겨 가진 것을 함께 나눈다면 훨씬 좋은 세상이 될 겁니다.”
그의 헌신적인 삶은 정해진 대상도, 범위도 없다.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그는 어디든 손을 내밀고 온몸으로 껴안는다. 아프지만 치료시설의 문턱에도 갈 수 없는 가난한 환자의 집을 찾는 일도 한때 간호사를 꿈꾸었던 그의 ‘주업무’이다. 몇 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 활동 반경이 예전같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도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 의약품을 나눠주려 손수 자동차의 핸들을 잡는다.

“가장 낮은 자리가 내 자리”라는 마리아 베르틸데 하르트만 수녀. 그가 다음달 28일 가장 아름다운 시민증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수녀님...부디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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