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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대는 왜 책을 가져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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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년 만에 선조들이 돌아왔다… 외규장각 도서 우리 손에… 마침내 고국 땅을 밟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297책 가운데 1차분 75책(유일본 8책)이 14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나머지 의궤들도 5월 27일까지 3차례에 걸쳐 돌아오며, 이 의궤들은 7월 19일부터 9월 18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 공개된다. 사진은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인을 기록한‘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하권의 반차도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佛, 제국주의 과시하려 古문서 수집

"각하, 아주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서적들로 가득 찬 도서실(외규장각)에서 공들여 포장한 340여권을 수집했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프랑스로 발송하겠습니다." "통역이 없어서 감히 확언할 수 없습니다만 이 책들이 조선의 역사, 문학, 전설에 관해 많이 밝혀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각하는 틀림없이 국립도서관에 전달할 만한 유익한 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1866년 11월 17일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점령한 구스타프 로즈 제독은 프랑스 해군부 장관에게 이같은 편지를 보냈다. 그는 또 편지에서 "강화에 도착하자마자 위원회를 조직하고 역사적 견지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물건들을 수색하는 일을 맡겼다"며 "이 위원회가 제출한 조서를 각하에게 보내드린다"고 썼다. 강화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외규장각을 발견하고는 귀해 보이는 물건은 모두 조직적으로 수습한 것이다.

외침에도 끄떡없이 왕실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1782년 정조(正祖)가 강화도에 지은 외규장각은 84년 만인 1866년 프랑스군에게 유린당했다. 프랑스군은 왕실 관련 귀중품과 책 6000여권 중 340책의 도서와 한·중·일 지도, 천체도, 대리석판, 갑옷과 투구 등을 가져갔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웠다.

그러면 프랑스 군대는 왜 책, 의궤를 집중적으로 가져갔을까.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의궤 대다수는 어람용(御覽用)이어서 표지와 종이 질, 장정이 훌륭해 한문은 몰라도 그려진 그림을 보고 가치를 알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의궤를 약탈한 배경은 '우연한 발견'이 아니라는 분석이 있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는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갈 때도 군대 안에 문화재를 구별하는 팀을 따로 운영했을 정도"라며 "프랑스군은 이런 차원에서 외규장각 자료를 가져갔을 것"이라고 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사회에 불고 있던 동양 고(古)문서 수집붐이 그 배경으로 떠오른다. 민병훈 국립중앙박물관 아시아부장은 "프랑스는 18세기 말 이래 서구의 동양학을 선도,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았다"며 "당시 프랑스는 국책사업의 일환으로 동양 문서를 적극 수집했고, 중국의 신해혁명 전후 사대부가 몰락하며 서적들이 시장에 나오자 학자들이 베이징으로 가서 방대한 양의 전적을 사들였을 정도"라고 말했다.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중국 둔황 막고굴에서 '왕오천축국전' 등 동양 고문서들을 무더기로 발견해 프랑스로 가져간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래픽=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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