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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투사·지식인·아버지…그 절절한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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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했던 고문의 기억
전기고문은 불고문
물고문에 질식하는 몸을
뜨거운 불인두로 지지고 튀겨
핏줄을 뒤틀고
신경을 마디마디 끊어내

22일간 고문끝 검찰 호송
아! 거기 인재근이 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을것 같은데…
물기 핑도는 그녀의 눈빛에
군부와 남영동 야수가 심은
죽음의 사탄을 몰아낸다

옥중서신
‘독재퇴진·민주주의 만세’
가막소 시멘트벽의 글에서
청년의 한숨·외로움을 본다…
애비가 어디가 오래 못와도
슬퍼하거나 약해져선 안돼

홍성우 변호사의 법정 회고
법정은 분노와 경악 가득
검찰은 고문주장 일축하고
법원은 재정신청마저 뭉개
김근태가 쓴 고문 탄원서는
검찰 손에서 사라져....


1985년 9월4일부터 26일까지 김근태 당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에 불법감금되어 처절한 고문을 당했다. 그가 쓴 탄원서, 항소이유서, 상고이유서에서 육성을 발췌했다. 인권변론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있는 한인섭 교수(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가 정리했다. 편집자

»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추모 미사가 열린 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고인을 추모하는 시민들이 성당 벽에 걸린 걸개그림 앞에 촛불을 켜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남영동에서

“지난 9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불법적인 고문에 의해, 동물적 능욕을 당했습니다. 본인에게 요구한 것은 항복입니다. 저를 깨부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전기고문은 불고문입니다. 물고문으로 땀이 배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엔 짧고 약하게, 그러다 점점 길고 강하게 전류 세기를 높였습니다.”

“물고문이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려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것입니다. 핏줄을 뒤틀고 신경을 마디마디 끊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라고 협박하면서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델시 가방을 든 건장한 사내는 ‘장의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너 각오해라. 민주화되면 네가 고문으로 복수하라’ 이런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비인간적 상황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고문자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말들을 태연히 주고받았습니다.”

■ 검찰청에서

22일간의 남영동 고문이 끝났다. “포니자동차로 호송되면서 낯익은 거리, 푸른 하늘이 아직도 있구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다시 왔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가 하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검찰청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아! 거기에 인재근(부인)이 있었다. 못 본 지 한달밖에 되지 않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하였다. 인재근의 삶 곁에 도저히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물기가 핑 도는 인재근의 눈빛이 나를 원상으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정치군부, 남영동 야수들이 심어놓은 내 가슴의 죽음의 사탄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 몸에서, 마음속에서 쫓겨나가기 시작했다.”

■ 법정에서

홍성우 변호사 “첫 공판기일, 한마디로 전율할 만한 법정이었습니다. 얘기하는 것 보면 몰라요? 진실한 말을 하는 건 누가 봐도 알아요. 법정은 경악과 분노와 눈물과 통곡으로 휩싸였지요.”

“오죽하면 대한변협이 나서서 고문경관들을 고발까지 했겠어요. 그런데 검찰은 고문 주장을 일축했어요. ‘김근태의 주장만이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할 하등의 자료가 없다.’(고 김원치 검사) 그래서 기소해달라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는데 법원은 처리도 않고 깔아뭉갰지요. 기가 막힐 일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김근태가 장문의 탄원서를 썼어요. 고문사실이 적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특히 고문경찰관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탄원서가 사라졌어요. 검찰 손에 있을 때 슬쩍 빼버린 거지. 우리가 공문서 절도죄로 고소까지 했어요.”

전두환 정권이 끝나면서 마침내 고문경찰관들이 기소됐다. 김근태는 그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판사는 앉아서 증언할 것을 권했지만, 김근태는 서서 증언하겠다고 밝혔다.

고 리영희 교수 “나는 날 고문한 책임자를 기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나보다 몇십배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 고문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날짜와 시간까지 재생해서 훗날 처벌을 가능케 했던 김근태의 초인적 능력에는 오직 감탄할 뿐이에요.”

■ 옥중서신

“판검사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감옥에 처넣어진 20대 초·중반 1000여명 청년들의 소리 없는 통곡을 들을 수 없다. 가막소(감옥) 벽에 여기저기 쓰인 글에서 나는 학생들의 가슴에 새겨 있는 한숨과 외로움을 보았다. 군사독재 물러가라, 민주주의 만세, 민주화운동은 승리한다, 서민생계 보장하라 등이 시멘트벽에 깊게 새겨져 있다.”

“내 귀여운 아이들아/ 너희들하고 놀아주지도 못하고/ 애비가 어디 가서 오래 못 와도/ 슬퍼하거나 마음이 약해져선 안 된다/ 외로울 때는 엄마랑 들에도 나가보고/ 봄 오는 소리를 들어야지/ 바람이 차거들랑 옷깃 잘 여며/ 감기들지 않도록 조심도 하고.”

 


빈소 표정

시민이 만든 ‘추모 동영상’…북 “애도” 조전 보내

2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빈소 입구에서는 시민들의 추모글이 담긴 알록달록한 접착메모지 1200여장이 조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장례 4일째, 김 고문을 추모하는 행사는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지고 있었다.

장례위원회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은혜 전 민주당 수석부대변인은 “우리도 경황이 없는 사이에 시민들이 여러 곳에 분향소를 차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2일 열리는 김 고문 추모제의 드레스코드를 하얀색으로 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고문의 빈소에서 틀고 있는 추모 동영상도 누리꾼들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지난해 11월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글에 가수 윤민석씨가 곡을 붙인 노래 ‘소금꽃편지’를 배경으로 김 고문의 생전 사진이 화면 속에서 하나씩 펼쳐졌다. 이 추모 동영상을 만든 오필진(37·자영업)씨는 김 고문을 만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했다. 오씨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드러난 시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과 김 고문의 별세에 대한 안타까움이 합쳐져 추모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인제 자유선진당 의원, 안상수 전 한나라당 대표 등 정치인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이날 빈소를 찾은 손숙 전 환경부 장관은 “이제 다 잊고 편안하셨으면 좋겠다”며 고인의 영면을 빌었다. 북한에서도 조전이 도착했다. 북한의 ‘민족화해협의회’와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지난달 31일자로 김 고문의 유가족과 민주통합당에 애도의 뜻을 전달했다. 이날까지 3만8000여명이 김 고문의 빈소를 찾았다.

이날 오후 4시,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는 시민 분향소가 차려져 빈소를 미처 찾지 못한 시민들이 김 고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오후 5시부터 명동성당 본당에서 김 고문을 위한 추모미사를 진행했다. 이어 명동성당 문화관에서는 배우 권해효씨의 사회로 추모 문화제가 진행됐다.

정말로...아버지만큼 존경했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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