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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 아내를 평생 사랑으로 보살핀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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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와 지적장애 아내

다들 퇴계를 조선의 성리학을 정립시킨 분으로, 엄숙한 유학자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개방적이요 인간적인 분이었다. 특히 재혼할 때 상대방이 정신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였고, 결혼한 후에도 그런 부인을 끔찍하게 챙긴 ‘애처가’였다. 그는 바로 높은 학문에다 덕(德), 즉 어진 인품까지 갖춘 이른바 ‘군자(君子)’였던 것이다.

퇴계는 두 번 장가를 갔다. 첫 번째 부인인 김해 허씨는 아들 둘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1살에 둘째 부인인 안동 권씨와 재혼했는데, 권씨는 정신이 혼미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당시 안동으로 귀양을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도 출가하지 못했다면서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퇴계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그만큼 퇴계는 국량이 넓은 분이었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유태가 그린 퇴계 이황의 초상화.
이유태가 그린 퇴계 이황의 초상화.
결혼 후 권씨는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지만, 퇴계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인내심으로 포용하여 부부의 도리를 다했다. 한번은 온 식구가 분주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도중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권씨는 얼른 그것을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다. 퇴계의 큰형수가 그것을 보고 나무랐다.
“동서, 제사상을 차리다가 제물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해서라네. 근데 그걸 집어 치마 속에 감추면 쓰겠는가?”
방안에 있던 퇴계가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앞으로는 더욱 잘 가르치겠습니다. 조상님께서도 손자 며느리의 잘못이니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진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큰형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세. 서방님 같은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야.”
얼마 후 퇴계가 아내 권씨를 따로 불러 치마 속에 배를 감춘 이유를 물었다. 권씨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자, 퇴계는 그 배를 손수 깎아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권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서는, 하필 붉은 천을 대고 기웠다. 그럼에도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입고 외출을 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경망스럽다고 탓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모르는 소리 말게.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렇듯 퇴계는 권씨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감싸주며 살아갔다. 그 후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소생의 두 아들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권씨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퇴계의 부부관은 이제 막 혼례를 올린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요 만복의 근원이란다. 지극히 친근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또한 지극히 바르고 조심해야 하지. 그래서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거란다. 허나 세상 사람들은 부부간에 서로 예를 갖추어 공경해야 하는 것을 싹 잊어버리고, 너무 가깝게만 지내다가 마침내는 서로 깔보고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고 말지. 이 모두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거란다. 그 집안을 바르게 하려면 마땅히 시작부터 조심해야 하는 것이니, 거듭 경계하기 바란다.”

이처럼 퇴계는 모름지기 부부란 서로 예(禮)를 갖추어 대할 뿐 아니라 마치 손님처럼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예란 겉으로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진심(盡心)으로 대하는 것을 말하였다. 원래 부부란 백년해로할 사람이요, 먼 길을 가는 자는 기본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 둘만이 있을 때조차도 예를 지키란 것은 아니었다. 내외간, 특히 부부간 잠자리에선 서로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하게 지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민간에서는 퇴계를 주인공으로 한 성적인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수록된 <퇴계 선생과 그의 부인>이란 이야기를 들어보자.

“퇴계 선생은 낮엔 의관을 차리고 제자를 가르쳤지만, 밤에는 부인에게 꼭 토끼와 같이 굴었다. 그래서 ‘낮 퇴계, 밤 토끼’란 말이 생겨났다.”

이처럼 퇴계는 성에 대해 개방적인 의식을 갖고 있었고, 아내와의 사랑에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현대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하고, 그만큼 쉽게 사랑을 포기하기도 한다. 사랑을 포기하는 이유는 성격이 맞지 않거나 사회적인 제약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지나치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거나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주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처럼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포용할 뿐만 아니라 서로 예를 지키고 애정으로 대한다면 소중한 인연을 쉽게 포기할 일이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물론 퇴계의 그러한 모습은 남녀가 비교적 평등했던 조선중기의 시대 상황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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