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사

전설로 기억될 '바람의 아들'

728x90
반응형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였던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KIA 타이거즈 구단은 3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1993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타이거즈에서만 16시즌 동안 활약한 현역 최고령 선수 이종범의 은퇴를 발표했다.

1970년생 이종범이 시즌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전격 은퇴를 선언함에 따라 이제 프로야구 최고령 선수의 자리는 1971년생인 최동수와 류택현(이상 LG 트윈스)이 이어받게 됐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196안타와 84도루, 그리고 불

멸의 30-60 클럽


▲ 이종범이 없었다면 타이거즈의 10회 우승 신화도 없었을 것이다.


ⓒ KIA 타이거즈



이종범은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수다. 이종범은 1993년 해태에 입단하자마자 도루 2위(73개), 득점 1위(85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차세대 슈퍼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그리고 1994년에는 타율(.393), 득점(113개), 최다안타(196개), 도루(84개) 1위에 오르며 리그 MVP까지 싹쓸이한다. 당시 세운 196개의 안타와 84개의 도루는 경기수가 133경기로 늘어난 오늘날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95년 방위병으로 근무해 홈경기만 출전하면서도 .326 16홈런 32도루라는 성적을 올린 이종범은 1996년과 1997년 해태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프로야구를 평정한다.

특히 1997년에는 세계 야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30-60클럽'이라는 만화 같은 성적을 올렸다. 만약 같은 해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이종범은 사상 초유의 홈런왕, 도루왕 동시 수상자가 될 뻔했다.

하지만 해태는 이종범이라는 '천재'를 데리고 있기엔 가난한 구단이었고, 이종범은 입단 후 5년 동안 한국시리즈 3회 우승을 달성하고 1998년 일본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한다.

이종범은 주니치 이적 첫 해 도루 부문 1위를 달리며 승승장구하지만, 6월 23일 가와지리 데쓰야의 공에 맞아 팔꿈치 골절상을 당하면서 급격히 흔들린다. 결국 이종범은 3년 반 동안 타율 .261 27홈런 53도루라는 평범한 성적을 남긴 채 2001년 후반기부터 해태를 인수한 KIA로 전격 복귀한다.

이종범은 2002년과 2003년 외야수로서 생애 5번째, 6번째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유격수와 외야수, 두 개의 포지션에서 모두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만 질주하던 이종범의 야구 인생은 2006년 .242 1홈런 10도루로 최악의 부진에 빠지며 흔들리기 시작한다. 급기야 2007년에는 타율 .174라는 전혀 '이종범스럽지 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은퇴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2년 연속 부진한 와중에 5억 원이었던 연봉도 절반 이하로 깎였지만, 이종범의 야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8년 타율 .284로 부활의 조짐을 보였던 이종범은 2009년 123경기에 출전하며 105안타 6홈런 40타점 11도루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견인한다.

하지만 양준혁, 이숭용 등 이종범과 함께 프로야구의 황금기를 보냈던 선수들이 하나, 둘 그라운드를 떠나고 신종길, 나지완, 김원섭 등 후배들이 약진하면서 이종범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말았다.

결국 이종범은 2012 시즌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이순철 수석코치와의 면담을 통해 은퇴를 최종 결정했다. 통산 1706경기에 출전해 타율 .297 1100득점 1797안타 194홈런 510도루 634볼넷을 기록했던 이종범운 그렇게 '바람의 전설'이 됐다.

나라의 슬픔 땐 대기록 달성도 뒤로 미룬 성실한 '시민'

프로야구 20년을 채우고 싶었던 이종범은 결국 20번째 시즌을 코 앞에 두고 유니폼을 벗게 됐다.


ⓒ KIA 타이거즈



타이거즈 팬들에게 이종범은 각별할 수 밖에 없는 선수다. 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라 광주의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하고 KIA 타이거즈에서 은퇴를 하는 진정한 '광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종범은 프로야구의 슈퍼스타뿐 아니라 국가대표로서도 한국 야구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선수다. 특히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주장을 맡아 해외파가 즐비했던 대표팀을 이끌었다.

특히 한국의 퍼펙트 4강이 결정된 일본과의 2차전에서는 8회말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규지로부터 2타점 2루타를 작렬하며 대한민국을 2002년 6월 이후 가장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이종범은 '시민'으로서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2009년 6월 21일 LG전에서 499도루를 성공시킨 이종범은 전준호의 기록을 200경기 이상 앞당긴 최소 경기 500도루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틀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종범은 500도루 달성이 유력했던 24일 히어로즈전을 앞두고 "500도루는 노무현 전대통령 영결식이 끝난 후에 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라에 슬픈 일이 생겼는데 자신만 대기록을 세우면서 기뻐할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그 순간만큼은 '프로야구 슈퍼스타'가 아닌 한 사람의 '시민'이었다. 결국 이종범은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 이 끝나고 일주일이 지난 6월 5일 삼성전에서 최소 경기(1439경기) 500도루 기록을 세웠다.

이제 막 은퇴를 발표한 만큼 이종범은 아직 향후 거취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KIA 타이거즈 구단은 이종범의 은퇴식을 위해 지금부터 바삐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쓸쓸한 퇴장은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이 용납할 수 없으니.



한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뒤안길...정말로 그대우'를 해줬으면 합니다...

이종범...그가 있어서 즐거웠고 감동이었습니다...사랑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