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사

이우

728x90
반응형

이우(李鍝, 1912년 11월 15일 ~ 1945년 8월 7일)는 조선 황실 황족이다.

의친왕의 둘째 아들.[1] 유약한 성격이었고 일제에 순종적이었던 형 이건과 달리[2], 이우는 일제에 반항적이었고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기 때문에 의친왕이 총애했다. 일제는 이런 그를 두고 "호랑이 같은 조선 황족의 핵심"이라고까지 칭했다고 한다.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의 양자가 되었기에, 일제 때 이왕가의 일원으로서는 양아버지 이준용이 갖고 있던 공(公)[3]의 지위를 계승했다.

이후 일제가 그를 일본의 황족과 결혼시키려 하자, 친아버지 의친왕의 뜻에 따라 박영효의 서녀인 박찬주와 결혼한다.[4][5]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이청, 이종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청은 미국에서 토목기사일을 했고, 이종은 브라운대 유학 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청은 2012년 현재 석파학술연구원을 설립하고 흥선대원군에 대한 연구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족들이 그랬듯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육사 30기로 졸업한 이우는 포병병과 교육을 1년간 받고 1936년 도쿄 주둔 제8포병연대에서 일본군 복무를 시작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에 소속 연대가 만주로 파견되어 1년간 근무했으며, 1938년 대위 진급 후 포병학교 교관으로 전임했다가 동년 12월 육대에 입학했다. 이후 1941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황족 신분으로 1942년 여름까지 말레이, 필리핀 등을 순시했다. 이후 일본군의 만주 일대 후방경계부대였던 제1군 사령부 참모장교로 1945년 5월까지 근무했다. [6] 이후 1945년 6월 일본 본토결전에 대비해서 히로시마 제2총군[7] 교육참모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일단 부임 전 휴가차 들른 서울에서 갑자기 병이 나고, 그가 병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이를 돌보느라 부임을 한 달 늦추어 7월 초순에야 히로시마에 부임했다.[8]

그리고 이우가 히로시마 주둔 제2총군 교육참모로 부임하고 한 달 뒤인 1945년 8월 6일, 이우는 정시에 기마헌병 2명의 호위를 받으며 애마를 타고 출근 중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곳에서 피폭했다. 당시 무좀 때문에 이우와 함께 말을 탈 수 없어서 이우의 관용차를 타고 한 시간 먼저 출근해 있었던 시종무관 요시나리 소좌[9]가 핵공격 사실을 알고 서둘러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이우가 발견된 것은 폭격으로부터 8시간이 지난 오후 4시경이었다.발견 당시에는 의식불명이었으나 서둘러 인접 해군병원[10]으로 후송하자 얼마 가지 않아 의식을 회복했다. 그를 진찰한 해군 군의관은 외상이 없다고 진단했고 이우 본인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아 불행 중 다행이라고 기뻐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극심한 피폭 증상[11]을 보인 후 피폭 다음날인 8월 7일 오전 4시경[12] 사망했다.

[image(94.5KB)]
(194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에 이우 사망 소식이 1면에 보도되었다.#)

일제의 패망 직후 시신은 1945년 8월에 서울 운동장(동대문 운동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흥선대원군 묘역인 흥원에 있다. 흥선대원군과 함께 안장된 이유는 운현궁에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상속자로서 운현궁계 왕족 묘인 흥원에 안장한 것이다. 본시 석상도 있고 신도비도 갖추어진 멀쩡한 무덤이었으나 아드님께서 화장하신 덕분에 원래 매장된 자리에 납골묘로 안장되어 있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영새부에 모셔져 있다고. 충공깽




주서9의 시종무관은 이우공이 죽은후...상관을 못 지켰다고..권총자살을.....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