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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장' '기춘 대원군' 김기춘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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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혐의로 21일 새벽 구속된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40여년 간 검사,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살아왔다.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서도 '왕실장' '기춘 대원군' 등으로 불리며 정권 실세로 권세를 누렸으나,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박 대통령과 김 전 실장의 인연은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시작됐다. 4·19가 나던 해에 21세 나이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김 전 실장은 1972년 최연소로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박 전 대통령이 그를 '똘똘이'로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1974년에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치검사·공안검사로 두각을 나타냈다. 같은 해 8월15일 육영수 여사 총격 시해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피의자 문세광을 수사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그의 자백을 받아냈다는 공을 세웠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 시도를 다룬 소설 '자칼의 날'을 읽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꺼내 자백을 이끌어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때부터 김 전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이 총애하는 젊은 검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도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김 전 실장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박정희 육영수' 이름을 딴 정수장학회의 1기로 장학금을 받았으며, 장학회 출신 모임인 '상청회' 회장을 지냈다.

김 전 실장이 처음 맞닥뜨린 위기는 1992년 말 대선 직전 일어난 이른바 '초원 복국집 사건'이다. 법무부 장관을 지낸 후 고교 선배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를 돕던 김 전 실장은 당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해 사회적 물의를 빚고 대통령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그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러나 김 전 실장은 관련 법 조항이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제한하고 있다며 위헌 심판을 제기했고, 헌법재판소는 위헌 제청을 받아들여 검찰 공소가 취소됐다. 나라를 들썩거리게 한 파문을 일으켰지만 법적 처벌은 받지 않고 빠져나왔다. '법 기술자'로 불리는 그의 면모가 발휘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후 잠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95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에 취임하면서 재기에 나섰다. KBO총재 취임 1년 후인 1996년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지역구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텃밭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역구였던 거제였다.

2004년 3월에 두번째 위기를 맞았다. 16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적극 주도했다가 역풍에 휘말렸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기사회생하면서 16·17대까지 내리 3선에 성공했다.

2008년 총선에선 공천 탈락했지만, 18대 대선 때는 박 대통령의 원로 참모진인 이른바 '7인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고, 2013년 박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대 최고령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김 전 실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2015년 1월 신년기자회견 발언에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우리 비서실장께서는 정말 드물게 사심이 없는 분"이라면서 "청와대에 들어올 때도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제가 요 청하니까 마지막 봉사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김 전 실장은 지난 수십년 동안 1인자 한 사람에게만 맹목적으로 충성하면서 자신의 권세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탄핵 심판에 처해져 마지막으로 그의 뒤를 돌봐주던 1인자를 잃게 되면서 70대 후반의 나이로 사법 처리를 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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