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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 높은 곳에서는 한 달 사이에 체험한다."
예지 쿠쿠츠카(1948~1989, 세계에서 두 번째 히말라야 14좌 완등)
[마니아리포트]창 밖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할 때 그가 들어섰다.
아침 일찍 삼각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라 했다. 늦어서 죄송하다고, 길이 막혀서 생각보다 늦었다고 한다. 머리칼에 눈이 흩뿌려 앉은 듯 반 넘게 흰 빛이다. 그의 책상 뒤편에 걸린 설산 배경의 사진 때문인지 내리기 시작한 눈발 때문인지, 또는 흰머리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어딘가 흰 빛이 섞여있는 것 같다. 따뜻한 차를 권하는 눈빛이 투명하다.
"2월 20일 네팔에서 세 번째 휴먼학교 준공식을 합니다. 이번 학교는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셨다는 룸비니에 지었습니다. 하나하나 지어갈수록 제가 배우는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많아지는군요."
장충동에 있는 그의 '휴먼재단' 사무실은 단출했다.
"16좌를 다 오르고 에베레스트 등반 중에 죽은 후배 박무택이의 시신을 수습하러 히말라야에 다녀왔다는 공로를 인정해서, 2007년에 파라다이스그룹문화재단에서 공로상과 상금 4천만 원을 주셨습니다. 그 돈으로 히말라야 산골마을에 학교 지어주는 일을 하는 재단을 만들었어요. 사무실도 파라다이스 그룹에서 그냥 내주신 거죠. 크진 않지만 크고 높은 희망이 만들어지는 사무실입니다."
'휴먼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는 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은 크고 높아 보였다. 걸린 사진들이 모두 가늠할 수 없이 크고 흰 산 풍경뿐이라 그런 것인가.
영원한 아픔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hima) 덮인 곳(alayas)이라는 뜻이라 한다.
7천만년쯤 전 지구 남쪽 끝에 머물던 인도 대륙이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여, 5천만 년쯤 전에 유라시아 대륙과 부딪치면서 그 사이에 있던 테티스해 깊은 곳의 지층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바다 깊은 밑바닥은 지표에서 8천 미터 이상 치솟아 산맥을 이루고 지금도 해마다 5센티미터씩 밀어 올려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세상에서 제일 높은 이 눈 덮인 산맥이 옛날에는 가장 깊은 바다 속 퇴적층이었던 것이다.
바다 속이든 산 꼭대기든, 깊고 높은 곳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다. 바다 속에 가장 깊게 잠수해 본 사람의 기록이 고작 100미터를 간신히 넘을 뿐이고, 산을 오를 때 해발 4천 미터 이상부터는 산소가 희박해지기 때문에 전문 산악인들도 고산증을 앓게 되기 쉽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심하면 구토를 하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게 되다가 더 심한 경우 뇌수종이나 폐수종으로 목숨을 잃게 되기도 한다.
5천 미터를 오르면 산소는 평지의 50프로, 7천 미터 이상에서는 30프로를 밑돌게 된다. 5천 미터가 넘는 곳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다. 눈과 바람과 추위만 있을 뿐이고 이따금 인도 기러기가 해발 6천 미터의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다가 따뜻한 배설물을 떨어뜨리곤 한다.
'설연화'라는 꽃은 그 배설물로 해서 씨 뿌려지는 인연으로 피어난다고 한다. 히말라야 고지의 적막한 기슭에서 설연화는 자신의 온기로 잔설을 녹이며 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꽃봉오리를 닫고 있다가 눈이 내리면 봉오리를 열어 꽃을 피우고, 억겁의 인연 속에서 외롭고 지친 산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히말라야에 사람이 사는 것은 해발 4천 미터 지점 아래부터이다. 엄홍길이 히말라야 사람들을 처음 만난 것은 에베레스트 등정에 처음 도전하던 1985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 에베레스트가 세계에서 제일 높다고 하니까 거길 올라보고 싶었던 거죠. 그땐 혈기왕성하고 자만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설악산 네 개를 한번에 오르는 정도라고 만만히 봤으니 당연히 실패했죠. 이듬해 두 번째 도전에서는 셰르파가 추락해서 죽었습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7800미터 지점 캠프4에서 캠프5로 이동하는 루트를 개척하고 있을 때, 그는 산소통과 식량을 보급하려고 캠프4로 오던 셰르파 두 명 중 한 명이 추락했다는 소식에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하게 된다.
"절벽을 내려오는데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낙석이 총알처럼 날아다니더군요. 눈 위에 붉은 피가 흩어져 있고 절벽에 걸려 찢어진 옷과 배낭, 바위 구석에 끼어 있는 설상화 한 짝이 연달아 보입디다.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울면서 몰려드는데, 시신이 불쑥 나타나 내 눈으로 보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결국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온몸으로 무시무시한 공포가 몰려왔습니다. 혹한 추위와는 또 다른 한기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고 다리도 덜덜 떨리더군요"
산에서 처음 겪은 죽음이었다. 하산하는 길에 4,060 지점에 있는 '팡보체' 마을을 지나는데 그곳이 죽은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살던 곳이었다. 술딤 도르지는 그때 스무 살, 열 다섯 살 신부와 결혼한 지 3개월 만이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저를 붙잡고 하염없이 통곡하는 홀어머니와 그 옆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린 신부를 보았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었더라면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지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셰르파sherpa는 네팔의 솔로쿰부 지역에 사는 고산족을 일컫는 이름이다. 티베트어로 동쪽을 뜻하는 '샤르shar'와 사람을 뜻하는 '파pa'가 합쳐진 말로 '동쪽에서 온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셰르파들은 인근에 학교가 없는 탓에 보통 1시간 정도는 산을 오르내려야만 초등학교에 이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다. '죽은 인도 사람이 살아있는 네팔 사람을 속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네팔 사람들은 순진하다고 한다. 인구 대부분이 문맹이고 계속된 내전 탓에 경제 발전을 꿈꾸기 어려워 낙후된 환경에서 생활하지만, 심성이 소박하여 한때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런 네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낙후된 곳에 사는 이들이 셰르파들이다.
어릴 때부터 손바닥 만한 집안 농사 일이나마 돕고자 초등교육마저 포기하는 셰르파들도 많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많은 셰르파들은 8천 미터급 산길의 안내자 역할을 자처한다고 한다. 부모들은 위험하다고 만류하지만 어린 셰르파들은 주방 보조나 가까운 곳까지 짐꾼을 한다고 둘러대고 집을 나와 설산에 오른다.
히말라야에 오르고자 하는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걸어야 한다. 히말라야의 이국 여행자들은 짐꾼을 사서 제 짐을 지게 하고 자신은 맨 몸으로 오른다. 짐을 지는 네팔 사람들을 포터라고 부른다. 네팔에서는 아이들을 포터로 고용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열두서넛 나이에 포터로 나선다고 한다.
보통 30킬로가 포터 한 사람의 몫인데 이 나이 아이들에게는 버거운 무게다. 여행자들은 산에 오르다 더우면 옷을 벗어 말리고 추우면 여러 겹의 옷을 껴입지만 아이들은 얇은 점퍼 하나만 걸치고 오른다. 포터들 중에는 슬리퍼를 신고 산에 오르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운동화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한 사람 당 한 명의 포터를 쓰는 경우는 드물고 여행자 두세 명이 한 명의 포터를 쓰기 때문에 짐은 그만큼 무거워질 수 밖에 없지만 포터들은 짐의 무게를 따져보지 않고 그냥 묵묵히 받아들인다. 고도가 높아지면 눈보라를 만나기도 하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그들은 모두 감내하며 그냥 오를 뿐이다. 어린 포터들의 하루 일당은 10달러 남짓이라고 한다.
" 그 아이들의 꿈은 대개 더 높은 곳의 안내자, 셰르파가 되는 거예요. 네팔에서는 가장 쉽고 빨리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고봉을 등정하고자 하는 산악인들은 5천 미터쯤 높이에 베이스캠프를 친다. 여기서 포터들은 산을 내려가고 셰르파들이 남는다. 히말라야 등반 도중 죽은 사람의 3분의 1 가량이 이들 셰르파들이다. 엄홍길은 16좌 등정을 위해 히말라야 8천 미터 급 고봉들에 38번 도전했다. 그 22년 세월 동안 4명의 셰르파와 6명의 대원들을 히말라야에서 잃었다.
아픈 실패, 슬픈 성공
" 제 산악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 도전에서는 셰르파가 희생됐고 3년 동안 연속 도전해서 간신히 오를 수 있었죠. 그 뒤 92년까지 여섯 번 연속 히말라야 고봉 등정에 실패했어요."
에베레스트 두 번째 도전에서 죽은 셰르파 가족의 오열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떠나왔는데 산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다시는 산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한다.
"산을 잊으려고 일상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자꾸 뒤에서 저를 끌어당겨요. 누군가 계속 부르는 것 같았죠. 절대 안 간다고 도리질을 쳤는데 결국 다시 가게 됐어요. 죽은 그 친구가 불렀던 것인지 산이 불렀는지, 오기가 생겨서인지……"
세 번째 도전에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지만 그 뒤 시도한 히말라야 고봉 등반은 계속 실패였다.
"그때 여섯 번 계속 실패를 겪으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죠. 그땐 혈기왕성해서 자만심이 하늘을 찔렀는데 자꾸 실패하다 보니 저 혼자 자신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산이 나를 받아줄 때가지 나를 낮추며 산에 올라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지요."
93년 초오유(8,201m)와 시샤팡마(8,072m)를 오른 데 이어, 95년 마카루(8,463m), 브로드피크(8,047m), 로체(8,516m)를 연속으로 오르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드는 것 같았다. 이 과정에서 얻은 동상으로 엄지 발가락 한마디와 둘째 발가락 일부를 잘라내야 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정도 감내하는 건 별난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특히 안나푸르나(8,091m)는 한 많은 곳이었다. 그가 아끼고 존경하던 후배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몇 달 전 사라진 곳도 이 산 남벽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안나푸르나는 '수확의 여신'이라는 뜻이라 한다. 에베레스트를 오른 자신감으로 1989년 겨울 처음 도전했을 때 이 여신은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음 해 다시 도전했으나 역시 실패였고 1997년 세 번째 도전에서는 혈육 같은 정을 나누어 왔던 셰르파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네 번째 도전에서, 정상을 얼마 남기지 않은 7,600미터 지점 절벽을 오르던 엄홍길은 추락하여 중상을 입는다.
미끄러져 추락하는 두 명의 셰르파를 구하려다 함께 추락하면서, 로프가 오른쪽 발목을 휘감아 비틀어 당겨지는 바람에 다리뼈가 세 쪽으로 부러지고 발목이 180도 돌아가는 복합골절을 당했다. 정상 표지에 꽂으려 가져갔던 대나무를 여섯 토막으로 잘라 부목으로 발목을 동여맨 다음 설벽과 크레바스를 헤치고 베이스캠프까지 3천 미터를 기어 내려왔다고 한다.
가까스로 귀국해서 만신창이로 부러진 다리를 네 개의 대못과 철심으로 이어 박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상처가 다 아물어도 등산은커녕 정상적으로 걸을 수도 없다고 했다. 산악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었다. 그는 낙담했으나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았다고 한다. 꼭 다시 일어나서 14좌, 16좌 완등을 이루겠다고 이를 악물며 바지 속에 쇠구슬 주머니를 달고 걸었다.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그를 보며 산우들은 눈물을 훔쳤다.
사고를 당한 지 5개월 만에 그는 쇠핀이 박힌 다리를 끌며 삼각산 정상에 올랐다. 통증에 눈물을 흘리며 그는 안나푸르나에 다시 오를 각오를 했다. 그리고 1999년 4월 29일 안나푸르나 정상에 선다. 그 등정의 거의 전 과정 동안 그는 다리를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울다시피 했고 정상에 올라서는 통곡을 했다고 한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서러움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함께 산을 오르다 죽은 동료 대원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품에 가지고 간 그들의 사진을 정상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그 산행에서, 그를 이어 정상에 오른 동료 대원이자 여성 산악인 지현옥이 하산 중에 셰르파 까미 도르지와 함께 실종되고 만다. 그의 울음은 피눈물로 변한다.
"산을 인간 한계를 실험하는 대상으로 생각했던 저에게 안나푸르나는 '산이란 경외의 대상임'을 알려주었습니다. 제가 오만했음을 알게 해준 것이죠."
그때부터 산의 안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지점에서 눈사태가 일어날 것 같다, 낙석이 있을 것 같다. 크레바스가 있을 것 같는 하는 직감이 신기하게도 들어맞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을 알아 갈수록 오히려 경외심과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커져갔다고 한다.
캉첸중가(8586m)도 아픈 봉우리였다. 1997년 첫 도전 때는 정상 400m 아래에 정상 공격을 위한 캠프를 설치하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내려서면서 등정을 확신했다. 그런데 같은 루트로 등반한 외국 등반대가 텐트에 놓은 식량을 바닥내고 장비를 가져가는가 하면 텐트 문을 열어놓는 바람에 눈보라가 들이쳐 텐트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는 꼭 정상을 밟겠다는 각오로 캠프에 올라섰으나 식량과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정상 공격에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1999년 두 번째 등반에서는 눈사태로 후배 대원과 취재 기자가 목숨을 잃었고 셰르파가 크게 다쳐 발길을 돌려야 했다. 2000년 봄 다시 도전했으니 마지막 캠프 진격을 앞두고 친동생 같은 셰르파 다와 따망이 낙빙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낙빙을 맞은 다와를 매트리스에 감아 내려오는데 다와는 자꾸 밖으로 손을 내밀었어요. 8천 미터 봉을 다섯 번이나 함께 등반한 친구였는데, 14좌를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었는데, 내 분신이나 다름없던 의형제, 정말 산 같은 친구였는데……"
싸늘하게 식어가는 다와의 시신 앞에서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장갑을 벗어 그 손에 끼워 주는 것 밖에 없었다. 대원들 모두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릴 뿐 말이 없었다. 의욕과 기력을 읽고 베이스캠프에서 며칠을 보냈다. 포기할 것인가, 재도전할 것인가. 그는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을 100m쯤 남겨놓은 설벽에서 박무택과 둘이서 밤을 맞았습니다. 거의 직벽이라 간신히 엉덩이 걸칠 자리만 마련하고 매달려 있었죠. 저와 박무택 둘 다 숨쉬는 것조차 힘들만큼 지쳐 있었어요.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죠.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군요. 엄청난 추위 속에서도 깜빡깜빡 잠이 들었어요.
그 때마다 제가 왁자지껄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앉아 있는 거예요. 깜짝 놀라 눈을 뜨면 무릎 위에 눈이 쌓여 있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뜨고 그때마다 무택아~, 무택아~ 불렀어요. 잠들면 죽는 거니까 서로 이름을 부르고 울면서 견뎠죠."
너무 고통스러워 포기하는 게 낫겠다 싶더란다. 산에 다니느라 벌어놓은 돈도 없는데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도 되고, 아이들에게 유언이라도 남겨놨어야 했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설벽에서 10시간 넘게 쪼그리고 있다 보니 온몸이 굳어 버렸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밝은 온기가 느껴지는 거예요. 아, 구름바다를 뚫고 해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 순간에도 너무 아름다워 입이 벌어졌어요. '살았구나, 살았다' 읊조렸죠.
그러고 나니까 해가 뜨면 곧장 하산하겠다는 결심이 사라지고 다시 정상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뭐예요. 기어서 올라갔어요. 정상에 서자 '캉첸중가의 신이여 고맙습니다'하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죽은 다와 따망, 후배들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을 참을 수 없더군요."
아프고 슬픈 성공이었다.
살아남은 슬픔
칸첸중가에서 그렇게 함께 사선을 넘었던 박무택은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숨졌다. 그 즈음 엄홍길은 새로운 목표를 오르고 있었다.
2000년 7월 K2 등정으로 아시아 최초, 세계에서 8번째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좌를 완등하고 나서, 위성봉이지만 독립봉으로 인정받는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382m)까지, 8천 미터급16좌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15좌 째인 얄룽캉 등반을 마쳤을 때 그는 에베레스트를 등반 중인 박무택에게서 위성전화를 통해 축하인사를 받았었다.
그게 그가 들은 박무택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박무택과 장민이 고립되자, 그들을 구하러 다시 올라갔던 백준호도 함께 탈진하여 모두 함께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박무택과 엄홍길은 칸첸중가 뿐아니라, K2와 시샤팡마, 에베레스트 등정에도 동행했던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얄룽캉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던 길에 엄홍길은 비보를 들었다. 8,750m에서 무택이 설맹에 걸려 주저앉아 있다는 소식, 그리고 결국 내려오지 못했다는 이야기, 시신이 실종된 것도 아니고 산비탈에 매달려 있어서 다른 산악인들이 오를 때마다 지나치고 있다는 전언이 차례로 들려왔다.
그는 세계 최초 16좌 완등의 마지막 목표인 로체샤르 원정을 뒤로 미루고 그들의 시신을 거두기 위한 원정대를 꾸렸다. 시신도 없이 차려진 빈소에서 이미 세 사람의 영정에 눈물로 약속했었던 것이다. 추위와 외로움에 떨며 설벽에 매달려 있는 후배들아, 내가 꼭 너희를 데릴러 가마……
그는 약속을 지켰다. 박무택의 모교인 계명대 산악인들로 '휴먼원정대'를 조직한 그는 2005년 3월 에베레스트로 떠나 77일간의 사투와 악천후로 인한 실패, 허리가 다치고 가래가 기관지를 막는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한다. 백준호와 장민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고 악천후로 박무택의 시신도 중간지점에 옮겨 매장하고 장례를 치른 절반의 성공이었으나, 산 사내들의 목숨을 건 우정과 약속을 속세의 필부 그 누군들 생각으로나마 흉내 낼 수 있을까. 어느 칼럼니스트는 이 '휴먼원정대'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그들이 오른 곳은 에베레스트라기 보다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인간애의 최고봉이었다."
16좌의 마지막 고봉인 로체샤르도 그를 쉽사리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2001년, 2003년. 2006년 세 차례나 실패했고, 2003년 등반에서는 정상 150m 아래에서 눈사태를 만나 박주훈, 황선덕 두 후배 대원이 수천 미터 절벽 아래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 황선덕은 30대 초반의 미혼, 박주훈은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40대 가장이었다. 그들은 변변한 보상도 보험금도 없이 가족을 남기고 떠나갔다. 전문산악인들은 보험 가입도 쉽지 않으니 죽은 자도 살아남은 자도 그저 막막히 슬플 뿐이다.
자일이 없는 상태에서 2천 미터 절벽 위에 칼날처럼 형성된 설릉을 가로지르는 게 우선 급한 일이었으니까요. 150미터 길이의 설릉을 빠져 나오는 데 몇 년 걸린 기분이었어요. 그러고 나니까 두 후배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2006년 세 번째 도전 때는 루트를 바꿨다. 그런데도 두 번째 등반 때 사고를 당한 설벽으로 접어들었다. 눈이 먼저보다 훨씬 더 많이 쌓여 있는 등 상태가 무척 나빴다.
"한참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엄홍길,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그래, 와봐라 이번엔 정말 가만두지 않는다'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로체샤르 신이 저를 야단친 거죠.
아, 이거 안되겠구나 싶어서 후배들에게 그냥 내려가자 했더니 왜요? 하면서 의아해했어요. 16좌를 오르려는 제 욕심 때문에 후배들을 더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7년 네 번째 로체샤르 원정은 '내 인생의 마지막 심판대'라는 생각으로 나섰다고 한다. '이번에도 히말라야의 신이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죽음으로 끝나리라'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한다. 초반에 제2캠프로 향하던 셰르파가 500m나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런데 당연히 저 세상 사람이 됐겠구나 싶었던 셰르파는 무릎만 탈골되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그때는 '로체샤르 신이 나를 버리지 않았구나, 성공할 징조다'하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막판까지도 로체샤르는 그를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후배 변상호, 모상현 그리고 셰르파 두 명과 함께 악투 끝에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등정이 잘 끝났다 싶었지만, 변상호가 설맹으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때 대장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대원을 안전하게 하산시키는 임무를 우선해야 합니다." 변상호를 로프에 묶어 모상현과 셰르파가 앞에서 로프를 잡고 끌며 그가 뒤를 받쳐주면서 칼날 설릉을 어렵게 통과하고, 설벽 구간에서는 먼저 내려 보낸 다음 뒤이어 내려서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사투 하루 만에 마지막 캠프에 돌아온 엄홍길은 후배의 아이젠과 신발을 풀어준 뒤 텐트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곤 죽음 같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적 같은 귀환으로16좌 완등이 마무리된 것이다. 축하의 분위기는 없었다. 잠 속에서도 오직 죽음의 지대에서 살아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현명근, 박주훈 황선덕…… 엄홍길이 히말라야 8천 미터급 고봉에 38번 도전하면서 잃은 대원들이다. 그리고 술딤 도르지, 나티, 까미 도르지, 다와 따망…… 그들 역시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셰르파들이다.
"제가 어떻게 해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좌를 등정하면서 히말라야의 신에게 약속했습니다. '저를 살려 보내신다면 그들을 위해 살다 죽겠습니다'하고요."
미친 남자
그런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산에 오릅니까. 이런 식상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산이 좋아서 오르죠. 운명적인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산에서 자랐으니 자연히 산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산에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숨진 산악인 조지 멜러리의 말이 흔히 인용되곤 하지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Because it is there)'라는 유명한 말이죠. 그 분의 이야기도 이해하지만 저는 산에 오른다는 것이 산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그러다가 도전욕 때문에 산에 올랐죠. 그렇지만 점점 산에 귀의하는 마음으로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냥 산이 좋아서 산에 미친 사람이 된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산에 가고 싶어 미칠 것 같고 산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무조건 산에 가게 되는 거죠. 히말라야에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도 서울에 오면 히말라야 흰 봉우리가 눈앞에 아른거리니 어쩌겠어요. 전생에 제가 산 속의 숲이었거나 바위, 아니면 작은 돌멩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가 산의 일부 같아요.
그러니 산에 미치는 거고, 미쳤으니 당연히 산에 목숨을 걸게 된 거죠. 부모님도 아내도 이해 못합니다. 산에 가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산에는 항상 새로운 도전이 있죠.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과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 그런 과정으로 보면 제게는 산이 '수도의 공간' 같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산에 오르는 이유를 개척 정신, 미지 세계에 대한 탐험과 동경, 뭐 이런 거창한 것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산에 오르고 싶어서 가는 거죠."
조용히 흐르는 말씨가 눈 덮인 산자락의 낮은 바람소리 같다.
그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세 살 무렵부터 도봉산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도봉산 중턱에서 등반객들을 상대로 한 가게를 했으니 도봉산이 곧 집이고 놀이터였다. 걸음마 내딛으면서부터 산을 타고 나무에 올랐다. 학교에 가려면 1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했으니 몸 자체가 산에 오르기 좋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클라이밍을 배우게 됐어요. 저희 집 위쪽에 두꺼비 바위라고 있었거든요. 저희 집에 오시는 분들 따라가서 등반하는 거 구경하다가 '신기하다, 재밌겠다' 하면서 따라 시작하게 된거죠. 그 전까지 '우리집은 왜 이런데 사나, 전기도 안 들어오고 테레비도 없는 데서' 하면서 원망이 많았는데 그런 게 어느 순간부턴가 싹 사라지면서 산이 제 몸 속으로 확 들어오는 것 같았죠. 호기심으로 시작한 건데 체질이더라구요. 암벽, 빙벽까지 타면서 전국 산을 오르기 시작했죠."
그러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7년 9월 그의 심장을 멈추게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고상돈,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산 등정'.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고상돈의 모습을 연일 신문과 텔레비전으로 접하면서 그는 꿈을 키웠다고 한다. '나도 저 꿈을 향해 올라가 보자'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한라산에서 설악산까지 다람쥐처럼 전국의 산들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산악인들과 만나며 등반에 대한 시야도 넓혀 나갔다. 한동안은 아예 설악산에 들어가서 하루 몇 번씩 짐 나르고 오르내리며 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군 UDT (Underwater Demolition Team)에 자원 입대했다.
"UDT 선택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된 훈련을 통해서 육체적으로 강해졌고 극한 상황에서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정신적 기술도 키울 수 있었죠. 혈기 넘치는 데다가 자신감이 생기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때의 자신감이 히말라야 도전의 밑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뭘 먹고 살았습니까. 내친 김에 더 속된 질문도 던졌다.
그런데 그냥 한 가지에 미쳐서 살다 보니 저절로 해결되는 게 많았어요.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가진 것, 바라는 것도 아무 것 없었는데 사회적인 상황이 달라지고 관심이 모이면서 기업들의 후원도 차츰 생겨났죠. 등산 인구도 많이 늘고 아웃도어 산업이 커지니까 요즈음엔 그런 기업들과 제품 개발에 대해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하고 홍보, 마케팅 면에서도 윈윈하는 겁니다. 후배 산악인 중에는 아웃도어 업체에 채용된 경우도 많아요."
산을 오르는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 이가 돕는다고 한다. "산 좋아하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 못 봤어요. 어떻게든 서로 돕게 됩니다." 그가 맑은 눈으로 웃는다.
영혼의 영역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까. 가족이 있는데요. 말리지 않았습니까…… 그는 이런 질문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저도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 동안 산에서 많은 동료를 잃고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죠. 그런 가운데 산에 오를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동료들의 죽음을 보면서 죽음에 익숙해지는 거죠. 죽음이 늘 곁에 있다고 생각하면 삶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해져요. 삶에 대한 애착도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서도 초연해집니다. 처음 히말라야를 등반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저 올라가고 또 성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산에서 여러 가지 사고와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간이 자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등반하는 순간에 저는 신에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순수하고 겸허한 마음을 갖고 순리에 따를 때만 산은 우리를 받아줍니다.
자연은 너무 위대하고, 인간은 너무 작은 존재죠. 그러니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함이 필요한 거죠. 저는 산에 오를 때 완전하게 산에 저를 맡깁니다. 대신 산은 제게 많은 것을 줍니다.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고통과 그것을 극복하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삶에 대한 겸손한 성찰의 기회를 주죠 .결국 산에 오르면서, 무서운 것은 산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듣고 있자니 가슴 어딘가가 비어져 나가는 듯 허전해졌다. 알아 들을 수는 있지만, 다 느껴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도시의 마천루를 승강기로 오르내리며 눈 앞의 짧은 셈법으로 얕은 흥정을 하며 살아가는 필부는, 그저 머리를 끄덕여 이해하는 시늉을 할 뿐이다. 속세의 말로 물었는데 그는 영혼의 이야기로 답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물론 이렇게 산에 미쳐서 다니는 저 때문에 고생해온 가족들에게는 참 미안합니다. 특히 산에서 죽음의 기로를 맞을 때는 가족들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죠. 아내도 제게 산 좀 그만 다니라는 말을 얼마나 하고 싶었겠습니까. 속으로는 수천 번은 했겠죠.
하지만 제 인생이 곧 산이고 산에 가는 것 자체가 인생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만 다니라고 해 봐야 소용 없는 걸 아니까, 굳이 말려봐야 서로 힘들어질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말은 않지만 속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을 묵묵히 잘 도와주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히말라야 16좌 고봉을 세계 최초로 오른 '위대한 산악인'이라는 선입견 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기는 어렵다. 하지만 꼭 그런 선입견을 접어두더라도, 그의 말본새는 평범한 것 같은데도 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서 같은 말이라도 투명하고 진실하게 들리게 하는 무엇인가를 가진 것 같다. 또는 진실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좀 모호한 질문을 던졌다."히말라야에 누구보다 많이 가보셨는데요, 히말라야 산 위에는 뭐가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종교인은 아니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으로서, 저는 산마다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히말라야 등반에는 길이 따로 없습니다.
다만 신에게로 가는 길이 있을 뿐이지요. 올라가 보면 8천 미터 지대는 영혼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육신이 닿을 곳이 아니지요. 그곳에 이르다 보면 전세계 산악인의 시신들이 즐비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그 위험한 곳에 올라간 게 아닐 겁니다. 8천 미터를 올라 본 사람은 압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설산에서, 투명하고 순결한 영혼과 드높은 정신에 닿게 되는 거지요.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들은 바로 그런 공간을 꿈꾸면서 올라가고, 마침내 정상이 아닌 정신의 정점에 우뚝 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곳으로 가면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제 자신입니다. 죽음과 맞닿으면서 대 자연 속의 나약한 인간, 그러나 투명한 의지의 영혼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한 번 가보면 잊을 수가 없지요."
가 본 사람만이 안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게 보통 사람의 속내이겠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마음에 그런 기분은 끼어들기 어렵다. 그만큼 8천 미터는 멀고 높은 것인가.
"그러나 정상에 서면 가장 먼저 폐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 옵니다. 기쁨은 순간이고 맥이 풀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탈감이 듭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관이 눈에 들어오면, 정상에 오르기까지 위험했던 순간순간이 떠오르고, 히말라야에서 스러져간 형제 동료들의 모습이 머리 속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잠시 동안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오싹한 느낌을 받지요. 그 순간이 지나면 곧 긴장입니다. 살아서 내려와야 하니까요.
하산이 더 어려운 경우가 많고 내려오다가 사고가 많이 납니다. 집중력을 잃지 않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서 동료 대원들과 셰르파들의 축하를 받으면 그제서야 진짜 등정의 실감과 기쁨을 느낍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순간이 옵니다."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는 사무실의 고도가 8천 미터에서 해발 5천 미터쯤으로 내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내려오다 보면 히말라야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그 산의 일부이지요. 가난하지만 너무나 착한 영혼들이고요. 저와 함께 산을 올랐던 셰르파들 그리고 저를 따랐다가 죽은 형제 셰르파들의 집이 있는 곳이지요. 이 사람들 덕에 제가 히말라야 열여섯 봉우리를 오를 수 있었던 것이고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학교
열여섯 봉우리를 다 오르고 내려온 뒤로, 그는 8천 미터 고봉에는 더 이상 오르지 않는 대신 새로운 봉우리를 목표로 세웠다.
"8천 미터 고봉의 절벽에서 로프 하나에 매달려 있을 때 히말라야 신에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수없이 빌었었죠. 제 목표를 달성하게 해 주시고 살아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히말라야 고봉들이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되갚겠다고 약속하며 빌었습니다."
그가 히말라야 고봉들을 오르내리면서 가장 주의 깊게 본 것은 1953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셰르파들의 고향인 해발 3,750미터 쿰중에 지은 학교와 병원이었다.
히말라야와 그곳 사람들을 사랑했던 힐러리 경은 2008년 작고하기 전까지 히말라야 산골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그곳을 이용할 수 있는 도로와 교량을 만들어 주는 등 가난에 허덕이는 히말라야 산간마을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엄홍길은 20년 넘게 히말라야에 오르내리며, 자신도 힐러리와 비슷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을 어느 새인가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히말라야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세우고, 히말라야에 그가 등정한 봉우리 수만큼의 학교를 지어주는 것을 그 재단의 첫 목표로 세워 일을 시작하게 된다.
"17번째 봉우리에 오르고 있습니다. 히말라야의 신이 저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줬으니 제가 약속을 지킬 차례죠. 이제 산 봉우리가 아니라 사람의 봉우리를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히말라야 산골 마을에 학교를 지어주는 일이 첫 번째 목표이고, 산을 오르다가 숨진 많은 사람들을 기리고, 지구 온난화에 대응하는 환경보호 활동 등을 봉사로 풀어나가려 합니다."
17번째 봉우리가 사람의 봉우리라고 할진대, 사람의 봉우리란 속세의 봉우리, 곧 돈의 봉우리일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잔잔히 웃으며 답한다.
"어쩔 수 없이 그 봉우리의 한 쪽 면은 그렇습니다. 사실 산에서 내려와 이렇게 도시의 사람들을 만나고 일한다는 게 저에게는 무척 낯설고 힘겨운 일이죠. 하지만 제가 청소년들에게 강연할 때 '단 1%의 희망만 있어도 성공할 때까지 도전하면 이룰 수 있다. 성공하는 방법은 성공할 때가지 도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거든요. 그게 제가 산에서 배운 성공의 방법이고 그렇게 진심으로 도전하면 반드시 사람의 봉우리에도 오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엄홍길휴먼재단'의 첫 사업은 히말라야 4천 미터 높이에 있는 팡보체 마을에 초등학교를 짓는 것이었다. 팡보체는 1987년 그의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서 죽은 셰르파 술딤 도르지의 고향이었다.
"술딤의 죽음은 제게 영원히 못 잊을 아픔을 주었죠. 결혼한 지 3개월 된 어린 신부와 노모가 통곡했던 장면이 두고두고 생각나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 술딤이 자기 마을에 학교가 없다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나서 훗날 학교를 꼭 지어주리라고 마음 먹었어요."
2009년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뜰 때만해도 주민들은 반신반의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 전에 외국의 여러 NGO 단체에서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돌아간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 폼만 잡고 사진 찍고 가겠지 했었다고 해요. 그도 그럴 것이 그곳에 학교를 지으려면 건설 자재를 운반해야 하는데 도로가 없으니 다 헬기로 일정 고도까지 나른 다음에 인부들이 등짐을 지고 꼬박 3일을 걸어 올라가는 방법 밖 없어요. 거기 학교 하나 짓는데 2억5천만 원 정도 들어가는데 자재 구입과 운송비가 다른 곳보다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돈도 돈이지만 중장비는 생각할 수도 없으니 땅을 파고 평탄작업 하는 것, 벽돌 한 장 한 장 쌓는 것 모두 사람 손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같은 규모의 학교를 도시에 짓는 것보다 돈과 노력이 배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죠. 그런 과정을 다 이겨내고 1년 만에 교실 4개와 강당을 갖춘 학교를 완공했어요. 50명이 공부할 수 있는 규모죠. 컴퓨터실, 도서실, 식수대, 양호실에 운동장까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 학교에서 네팔의 인재가 자라날 겁니다."
'사람의 산'에서 몸을 굽히다
산에 오를 때 그는 '탱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목표가 생기면 탱크처럼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히말라야 사람들이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는 길은 교육 밖에 없다.'며 그는 학교 짓는 일에 탱크처럼 저돌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한다. 2011년 2월에는 제 2호 휴먼스쿨이 180명이 교육받을 수 있는 규모로 히말라야 산골 타르푸 마을에 완공됐다.
그리고 오는 2월 20일 히말라야 남쪽 기슭 룸비니에 200명을 가르칠 수 있는 3호 휴먼스쿨이 준공될 예정이라 한다. 세 번째 학교를 지으면서는 마을 전체 주민들의 식수를 공급할 급수시설도 만들었다고, 컴퓨터도 네팔 정부에서 쓰는 것보다 좋아서 공무원들이 부러워한다고, 네팔 학교 건축의 표준 모델로 꼽히기도 한다고, 이제 4호 휴먼스쿨을 지을 곳은 카스키라는 지역으로 선정됐다고…… 어린 아이처럼 자랑스러워하며 자료를 보여준다.
"학교만 지어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학용품도 지원하고 교사들 월급도 지원해야 합니다. 간호사도 채용해서 마을 주민들 건강도 봐주고 있죠. 우리나라 의료진을 모시고 진료봉사 활동도 하러 갑니다. 그때는 새벽부터 인근 주민들이 몰려와서 마을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답니다."
한 해 1인당 국내 총생산이 450달러인 네팔의 나라 살림에서 그 깊은 산간 오지의 교육과 위생까지 살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네팔 사람들과 현지 사정을 아는 산악인들은 팡보체에 1호 휴먼스쿨이 개교하자 '이것은 기적'이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2호 휴먼스쿨 준공식 때 네팔 정부는 휴먼재단 관계자들을 대통령 궁으로 초대해서 고마움을 표현하고 '마을 주민에게 주신 염소를 잘 키우고 활용해서, 네팔 새마을 운동의 시초로 삼겠습니다' 라는 인사도 했다 한다.
전에는 목숨을 걸고 산을 오르셨지만 이제는 얼굴을 걸고 돈을 만들어야 하는 거네요. 어느 게 더 어렵습니까. 이 질문에 그의 얼굴은 좀더 진지해진다.
의지가 굳어도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상금으로 받은 4천만 원을 종자돈으로 내니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 100여 명이 힘을 보태서 재단을 만들었고, 지금은 100만원의 후원금을 내고 가입해서 새 사업이 벌어질 때마다 주머닛돈을 내놓는 이사가 80여명, 한 달에 1만원 이상 정기 후원하는 회원이 800여 명 된다고 한다. 얼핏 계산해 봐도 그 돈으로는 학교는커녕 화장실 하나 짓기도 빠듯해 보인다.
"첫 번째 팡보체 학교는 후원금과 이사들의 십시일반 성금으로 지었고 2호 휴먼스쿨은 라이온스 354D 지구에서 1억 원을 쾌척해 주셔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세 번째 학교는 '밀레'라는 아웃도어웨어 회사에서 1억2천만 원을 지원해주셨습니다."
대기업에서는 관심 갖고 도와주지 않나요. 큰 회사들은 홍보비만 해도 한 해에 수백억 이상 쓰는데 그들이 엄대장과 함께 봉사하면 그게 그 회사 홍보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런 회사에서 관심 가져주시면 물론 큰 도움이 되겠죠. 대기업이 아무 이해관계 없는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 짓는 데 기여하고 봉사 프로그램까지 마련한다면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모범이 되겠죠, 하지만 제 능력이 아직 거기까지 닿지 않고 노력이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제가 산에만 다니다 보니 산 사람들 말고는 잘 알지 못해서……"
산 속에서 배운 대자연에 대한 겸허함과 도시 사회 속 '사람의 산'에서 여기저기 몸을 굽혀 부탁하는 일은 다를 것이다. 같은 것은 '성공할 때까지 도전한다'는 그의 마음뿐일 터.
히말라야에 학교를 짓는 일 말고도 그는 청소년, 장애인들과 함께 산행하면서 희망을 전하는 일, 기후 온난화로 인한 환경 파괴의 재앙에 대해서 알리는 일, 산악인들의 유가족을 보살피는 일 등을 그의 휴먼재단을 통해서 해나가고 있다.
설연화
"자기를 다 내던져서 하면 안될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도 다 되어왔습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까마득해 보이던 일들도 그냥 온몸을 다 바쳐서 하다 보니 어느새 되어 있고 그랬죠. 산을 오르는 것도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안됩니다.
저는 사실 히말라야 눈 속에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인데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도 결국 동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죠. 16좌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나약한 인간인 저를 산이 저를 받아주고 살려주었기 때문인데 그 희생에 답하는 저의 희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말라야에 산 꼭대기에 정말 '설연화'가 피고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한다. 차가운 눈 속에서 자신의 열기로 눈을 녹이며 피어난다고, 인연 있는 이는 볼 수 있다고……
엄홍길을 만나는 짧은 시간은 따뜻했고 글을 쓰는 내내 괴로웠다.
8천 미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따라 올라가지 못하는 정신의 범박함이 부끄러웠고, 16좌를 넘어 17좌에 오르려는 꿈의 고도를 가늠하기 어려워 글은 점점 길어졌다, 지상에서 가장 높고 험한 열여섯 곳의 성지를 순례하고 속세에 내려와 사람들 속에서 순교하려는 이 수도자의 설법에 거리를 두지 못하고, 자꾸 교화되려 하는 글의 욕망을 되돌리기 어려웠다.
설연화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그와 함께 히말라야에 가고 싶다. 설연화 같은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글 류석무 / < barox >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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