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ㅡ친손녀 쓸쓸한 죽음 알려진 날
安의사 장남은 日에 의한 독살說, 차남은 日 강요로 이토 아들에 '사죄'
손자·조카들까지 대부분 비극적 삶…
이토 히로부미ㅡ5세孫 마쓰모토는 日외상에 취임
日언론 "메이지 유신 공신의 후예"… 마쓰모토 부친도 방위청 장관 지내
'정치인'보다 '이토 후손'으로 더 유명
19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사형당한 날이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두(驛頭)에서 한국 강제병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투옥됐었다. 안 의사 서거 101년 만에 이토의 5세손이 일본 외무대신이 됐다.
9일 일본의 새 외무대신에 기용된 마쓰모토 다케아키(松本剛明·51) 중의원 의원은 일본에서도 '유력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5세손'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일본 언론들도 이날 보도에서 이 사실을 빼놓지 않았다. '메이지(明治) 유신의 원훈(元勳·최고공로자) 이토 히로부미의 5세손'이라고 쓴 신문도 있었다.
- ▲ 안중근 의사(오른쪽)와 친손녀 연호씨. /주완중 기자·산책중 제공
1885년 12월 일본 내각 창설 후 초대 총리대신이 된 이토는 초대 외무대신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 이어 1887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외무대신을 겸임했다. 마쓰모토 대신은 제2대 외무대신인 이토에 이어 124년 만에 제145대 외무대신에 취임한 것이다.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을 지낸 이토는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데 앞장섰고 고조 할아버지에 이어 외무대신이 된 마쓰모토 대신은 미래의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만들어가야 할 책임을 지게 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와 대를 이어 악연을 맺었다. 안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으나 유골이 어디 있는지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일본 정부도 유골 확인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안 의사의 장남 분도는 7살(또는 12살)때 죽었는데 일본 정부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이 있다. 또 둘째 아들 준생이 1939년 10월 16일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경성에 있는 이토를 추모하는 절 박문사에서 이토의 아들 분키치(文吉)를 만나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한 서글픈 일도 있었다.
한국을 강점하는 데 앞장섰던 이토의 후손은 일본의 외무대신이 되었지만, 한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안 의사의 후손들은 대부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아들 준생은 광복 직후 백범 김구 선생으로부터 안 의사의 정신을 배반한 '민족 반역자'로 지목됐다. 준생은 해방 후 한동안 귀국하지 못하다가 조용히 입국해 1952년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준생의 부인 정옥녀 여사는 남편이 타계한 후 아들 웅호(79)씨와 딸 선호·연호씨를 데리고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 ▲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5세손 마쓰모토 다케아키. /게티이미지 로이터 뉴시스
안 의사의 손자인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전문 의학박사가 됐으나, 20년 전 뇌수술 후 지금까지 투병 중이다. 안의사의 손녀 선호씨는 2003년 세상을 떠났고, 연호씨는 지난달 미국에서 췌장암으로 타계했지만 국내에는 최근에야 알려졌다. 웅호씨의 아들로 안 의사의 유일한 증손자인 토니 안(한국명 안보영·47)씨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을 갖고 있다. 미국 통신회사에 다니고 있는 토니 안씨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한다.
안 의사의 조카들도 불행했다. 동생 안정근의 딸 미생씨는 김구의 장남 김인과 결혼했으나 1945년 남편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폐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생씨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남편 김인과 사이에서 난 딸의 생사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안 의사는 처형 직전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 근처에 묻었다가 해방되면 고국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해방 후 김구 선생이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2008년 정부 차원에서 유해발굴을 시작했으나 아직 성과가 없다. 안 의사 백부(伯父)의 증손자인 안기하(60)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안 의사의 유해가 있는 곳을 일본 정부가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첫째 그곳이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거나, 둘째 국내에 모셔온 이후 한국 내에서 배일 감정이 확산될 것을 걱정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토 히로부미의 후손이 외무대신이 되면 유해를 찾는 데 오히려 협조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고 말했다.
마쓰모토 대신은 이토로부터 딸 쪽으로만 계속 갈라져 나온 가계다. 이토 히로부미 둘째 딸의 큰딸의 넷째 딸이 마쓰모토 대신의 어머니인 에스코(悅子)다. 부친은 중의원 의원 출신으로 방위청 장관을 지낸 마쓰모토 주로(松本十郞)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먼 외가 쪽 인연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쓰모토 대신 자신도 이토의 5세손이라는 사실을 적지 않게 의식해왔다고 한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이토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먼저 얘기했으며 한국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중의원 운영위원장으로 있던 작년 9월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에 관련된 자료를 찾아 한국측에 넘겨주고 싶다는 뜻을 밝힌 적도 있다. 그러나 바로 외무부대신으로 이동한 뒤, 10월 4일 공로명 '안중근의사 유해발굴추진단 자문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열심히 찾고 있으나 아직 찾지 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마쓰모토 대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대체로 중도성향이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그가 개인 홈페이지에 쓰고 있는 정치일기 중 작년 12월 3일자를 보면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 반환협정에 대한 일본 국회의 비준이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해 아쉬워하는 내용도 있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국회 폐회…. 외국과의 약속인 조약이 (폐회에 따라) 폐안된 일은 최근에 없었다. 이야말로 수의 폭거 아닌가"라고 썼다. 바로 이 국회에 반환협정 비준안이 상정됐다가 야당인 자민당 등의 반대로 처리되지 못했다.
야스쿠니(靖国) 신사 참배에 반대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는 야당 시절인 2005년 9월 중의원 예산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총리에게 "올해도 참배할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는 내용이 속기록에 남아 있다. 미·일 동맹 중시파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의 진로와 관련해 다소 다른 생각도 하는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07년 1월 1일 쓴 정치일기에서 "(일본 정치의) 잘못은 외교·내정 모두에서 미국 추종의 길을 선택해왔다는 점"이라고 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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