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거론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황희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말이 낙성식이지 크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되려 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 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하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과연 최장수 재상을 지냈으면서 이처럼 청빈하였으니 청백리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황희라고 하여 어찌 재물이 싫어했겠는가? 그 역시 한때는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산 적이 있었다. 1428년(세종 10년) 6월 25일 황희는 박용의 아내로부터 말을 뇌물로 받은 일로 인해 사직을 청하였다. 당시 이 기사에 대해 사관(史官)의 평가가 있었는데, 사관은 박용의 아내 관련 일 말고도 아래와 같은 내용을 추가로 적고 있다.
김익정(金益精)과 함께 잇달아 대사헌이 되어서 둘 다 중 설우(雪牛)의 금을 받았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황금(黃金) 대사헌’이라고 하였다. 또 난신 박포(朴苞)의 아내가 죽산현(竹山縣)에 살면서 자기의 종과 간통하는 것을 우두머리 종이 알게 되니, 박포의 아내가 그 우두머리 종을 죽여 연못 속에 집어 넣었는데 여러 날 만에 시체가 나오니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현관(縣官)이 시체를 검안하고 이를 추문하니, 박포의 아내는 정상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서울에 들어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 토굴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때 간통하였으며, 포의 아내가 일이 무사히 된 것을 알고 돌아갔다. 이 밖에도 이 날의 기사에는 황희가 장인 양진(楊震)에게서 노비를 물려받은 것이 단지 3명뿐이었고,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많지 않았는데, 집안에서 부리는 자와 농막(農幕)에 흩어져 사는 자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백리로 알려진 황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