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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중호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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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을 존경하던 학생

최중호 이미지 1

최중호 선생은 1891년 1월 20일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태어났다. 신천은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을 비롯해 일명 ‘테라우치 암살사건’으로 유명한 안명근 등 수많은 항일지사를 길러낸 고장이다. 선생이 태어날 무렵 한반도는 안으로는 봉건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밖으로는 일본 및 서구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있던 혼란기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선생은 어머니 황성애(黃聖愛, 1868~1935)의 슬하에서 자랐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했고 17세 경 유중현(柳重賢, 1890~1985)과 결혼했다. 결혼 후 아들 둘을 두었으나 홍역으로 잃었고 1914년 ‘105인사건’으로 석방된 후 낳은 셋째 최채(崔采, 1914~2006)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그는 후일 중국에서 선생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45년 일제 패망 후 중국에 남아 신중국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최채에 이어 최윤신, 최윤경, 최윤애 등 4남매가 있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한편 신학문을 배우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생이 신학문을 배우는 데는 고향 인근인 해주 출신 김구와의 인연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1906년 선생은 황해도 안악에서 김구와 함께 공부하였다. 선생은 1907년 김구가 양산학교에서 소학부를 담당하고 있을 때 그의 집에서 하숙을 하며 그 학교 중학부에서 공부했다. 양산학교는 1907년 김효영과 손자 홍량 등이 교육구국을 위하여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김구가 교장으로 취임하였기 때문에 황해도 일대의 뜻있는 청소년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후 선생은 평양에 있던 대성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김구로부터 총애를 받은 학생 중의 한 사람이었고, 선생 또한 누구보다도 김구를 따르고 존경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김구의 백범일지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왜놈은 한국을 강점한 후 첫 번째로 국내의 애국자를 망라하여 체포한 것이다. 황해도를 중심으로 먼저 안명근을 잡아 가두고는, 계속하여 전 도내의 지식계급과 부호를 일일이 압송하였다. (중략) 신천의 이원식, (중략) 최중호, (중략) 함경에서 이동휘였다. (중략) 그놈들이 또한 정신을 잃도록 가혹하게 고문하였다. “학생 중에는 누가 너를 가장 사랑하더냐?”라는 말에 졸지에 내 집에 와서 공부를 하던 최중호를 말하고선 혀를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 오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눈을 들어 창밖을 보니 벌써 언제 잡혀왔는지 반이나 죽은 것을 끌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평양대성학교

김구가 상투를 자르고 나서 직접 가위를 들고 선생의 상투를 잘랐다는 일화는 두 사람의 깊었던 관계를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김구와의 인연은 선생이 후일 독립운동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선생에게 있어 김구는 평생의 독립운동 선배이자 동지였다.

선생이 결혼한 1907년 그해는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인해 망국을 걱정하던 우국지사들이 궐기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이윽고 결혼한 지 3년 만인 1910년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병합 당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제병합 이후 선생은 일제가 항일운동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소위 테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에 연루되었다. 1910년을 전후해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역에서는 신민회와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민족독립운동이 뿌리 깊게 전파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이 지역의 배일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이들이 테라우치 총독 암살을 기도하였다고 하여 서북지방의 배일 기독교인과 신민회원을 다수 체포하였다. 이른바 ‘105인사건’이다.

105인사건 관련 책자(선우훈 저)와 105인사건 압송 장면

1911년 1월 이 사건으로 먼저 체포된 김구가 자신을 존경하는 후배의 이름을 대라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선생의 이름을 말했다. 1911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된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유배형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1914년 선생은 유배에서 풀려나 귀향하였다. 이즈음 선생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후진양성과 아울러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일본 관청 습격 등의 죄목으로 해주지방법원에서 15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으로 확정되었으나 1917년 탈옥에 성공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한 상해 망명

1917년 탈옥한 선생은 신의주를 거쳐 만주 안동, 하얼빈 등지를 전전하면서 활동하였다. 만주에서 체재하고 있던 선생은 1919년 거족적인 3ㆍ1 독립운동이 일어난 뒤 상해로 망명하였다. 당시 상해는 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로 열강의 조계 내 세력 관계를 이용하여 약소민족국가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3ㆍ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그럼으로써 상해가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민족지사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선생은 상해로 망명한 직후 이름을 황훈(黃勳)이라고 개명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으레 여러 개의 가명을 가지고 있었다. 자료에 따라 황훈(黃塤, 黃勛)으로 나오기도 한다. 선생이 황씨로 개명한 것은 외가의 성을 따른 것이었다. 1920년 최중호는 교회의 연락망을 통해 국내의 가족을 상해로 불러들였다. 선생의 어머니, 아내, 채와 윤신은 상해에서 다시 합치게 되었다.

선생 일가는 상해 프랑스조계 영경방 10호에서 김구 가족과 한 집안에 거주했다. 집 안에 아래위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김구 일가는 2층에 살고 선생 일가는 1층에 살았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아들 신을 낳고 계단을 내려오다 낙상하여 늑막염으로 유명을 달리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상해에 온 선생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내무부 경무국에서 활동했다. 여기에는 경무국 국장으로 있던 김구의 주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무국은 오늘날 경찰청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임시정부를 호위하며 상해에 침투한 일제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생의 경무국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임시정부 공보 제15호에 의하면, 1920년 2월 24일 내무부 경호원으로 활동하던 선생은 그 자리를 그만 두었다.

선생은 이미 그 이전에 항일군사인재를 양성하는 육군무관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육군무관학교는 1919년 말 임시정부가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했던 사관학교였다. 졸업생은 국내와 일본 혹은 남만주의 임시정부 산하 대한광복군총영 등에 배속되어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사민보(1921. 10. 1.)

선생은 육군무관학교에 제1기로 입학하여 6개월의 힘든 훈련 끝에 졸업하였다. 제1회 졸업생은 모두 19명이었다. 1920년 5월 8일 상해 대한거류민단에서 거행된 제1회 졸업식에서 선생은 4명의 최우등생 가운데 한 사람이자 6개월 동안 하루도 결석이 없는 정근생으로 상을 수여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노력과 근면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일제 관헌자료에 의하면, 선생은 1921년 7월 경 광동으로 갔다가 돌아온 바가 있었다. 선생의 광동행은 현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광동호법정부에 대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또한, 광동에서 상해로 돌아온 후인 1921년 10월 경 상해에서 기호파(畿湖派) 독립운동 인사들인 박태하, 황일청, 김성근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일제기관 등에 대한 폭탄 투척을 계획하였다.

그런가하면 선생은 언론활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1921년 10월 선생은 한자신문 <사민보(四民報)> 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민보는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원로 독립운동가였던 박은식이 광동성 공교회 회장이자 부호였던 중국인 임택풍과 합작하여 항일선전을 목적으로 발간했던 신문이다. 신문사는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 망평가 261호에 위치했는데 임택풍은 박은식과는 뜻이 잘 맞는 절친한 사이로 사민보 발행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또한, 최중호 선생은 박은식과는 동향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상해에서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선생과 박은식의 인연은 선생의 딸 윤신이 박은식의 아들 박시창과 혼인함으로써 계속 이어졌다.

선생은 신문사 안에 기거하면서 박시창ㆍ박경산ㆍ박태하ㆍ김문세ㆍ이영운 등과 함께 이 신문의 편집 발행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사민보는 16면의 일간지로 배일의식을 고취하는 기사들을 게재하였다. 발간 부수는 3만여 부로 그 가운데 2천여 부는 한국 내에 우송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특히, 박은식은 이 신문에 강렬한 항일논설을 게재하거나 이순신장군 전기를 연재하여 국내외 조선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고무하였다.

인성학교에서 민족교육에 힘쓰다

선생은 1924년 3월 8일 상해대한교민단 제11회 정기의사회에서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즉 교민단의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의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교민단의 기본 업무는 교민의 생활을 보호하고, 임시정부 기반조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교민의 교육, 위생, 소방, 교통, 병원(兵員) 모집, 빈민구제, 민적(民籍) 사무, 교민 보호와 치안 확보, 밀정 제거 등이었다. 그 외에 중국인이나 기타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비와 분규를 해결하는 일도 중요했다. 민단은 이와 같은 업무를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와의 협조 아래 정기적으로 교민의 호구와 자산 조사를 실시했다.

선생은 다음해인 1925년 10월 안공근, 김두봉, 최석순 등과 함께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선생은 1934년 타계할 때까지 교민단 관련 활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이 교민단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프랑스조계 당국도 인정한 바 있거니와, 상해 한인사회에서 선생의 평판이 그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교민단에 재직하던 선생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교민단이 운영하던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육활동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1924년 교민단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인성학교는 1916년 상해에서 설립된 민족교육기관이었다.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1910년대 초부터 상해에는 소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자녀 교육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인성학교는 이러한 요구를 수용하여 설립되었다. 인성학교의 교육목표는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인성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은 임시정부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상해 인성학교 교직원과 학생 (좌), 상해 인성학교 졸업증서 (우)

물론 선생의 자녀들도 인성학교를 다녔다. 장남 최채는 7기생으로 선생이 학감으로 재직하던 1927년 졸업했다. 장녀 최윤신은 10기생으로 김두봉이 교장으로 있을 때 졸업했다. 그들은 인성학교에서 국어, 한국역사 및 지리를 배우면서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1926년 10월 선생은 인성학교 학감(學監)에 취임하였다. 오늘날의 교감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당시 교장은 조상섭이었다. 선생이 학감으로 있던 시기 인성학교는 교사를 이전하였다. 날비덕로 우기리 2호 교실은 너무 협소하여 마랑로 협성리 1호로 이전하고 교무 전반을 확장하였다. 마랑로 인성학교는 1935년 폐교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선생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인성학교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인성학교는 설립 직후부터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렸다. 수입보다는 경상비로 지출되는 비용이 많아 재정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교민단이나 유지회, 찬조회 등을 조직하여 인성학교의 재정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성학교의 재정적인 어려움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32년 4월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로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자 상해 일본총영사관은 외롭게 프랑스조계에 남아 민족교육을 지속해가던 인성학교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 일본영사관은 인성학교에 대해 일본어교육을 실시하라고 강요하였다. 결국 선생이 타계한 다음해인 1935년 11월 11일 선우혁(鮮于爀) 교장을 비롯하여 학교 교직원들이 일제의 요구를 거부, 모두 사직하면서 인성학교는 사실상 폐교되고 말았다.

선생이 관계했던 인성학교와 마찬가지로 선생의 집안 형편 또한 매우 어려웠다. 배고픔은 늘 망명자들을 위협하고 시달리게 하는 것이었고, 하루 두 끼를 먹는 날도 드물었다. 임시정부도 집세를 낼 돈이 없어 정부기관이 한인 집에 가서 사무를 보고 김구와 같은 요인들도 동가식 서가숙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장남 최채의 회고에 의하면,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은 쪼들릴 대로 쪼들렸다. 선생은 임시정부 일을 보았지만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일보에 지인이 있어 조선일보 상해지국장이라는 명목으로 신문을 팔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체 상해에 사는 동포의 수가 많지 않았고 또 신문을 사 보는 사람이 적어 그 수입이 미미했다. 식구들의 입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었다. 따라서 선생의 부인이 한인 상점에서 바느질하고 녹두전이나 떡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기사(독립신문 1926. 9. 3.)

어린 최채는 신문배달도 하고 사과도 팔아 가계를 보태고자 했다. 장녀 윤신도 열세 살부터 삯바느질을 했다. 침대보 하나를 수놓으면 1원을 받았는데, 그 돈이 선생의 한 달 약값이었다. 당시 선생은 늘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얻은 병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한인 동포나 임시정부가 어려울 때는 그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선생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재정부족 등으로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한 운동에도 동참하였다. 1926년 7월 8일 안창호 등은 상해 삼일당에서 “우리의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연설회를 열어, 임시정부 후원단체의 조직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임시정부경제후원회가 결성되었다. 선생은 여기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하는데 적극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외에 선생은 1928년 만주 동포의 박해를 반대하는 상해 동포 대회에서 의연금을 내기도 하였다.

독립운동 일원화를 위한 노력, 그리고 순국

원래 선생은 민족주의자였으나 1920년대 후반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경우는 당시로서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1926년 7월 16일 선생은 혁명청년사 간부로서 김규식, 송병조, 이유필, 정인교, 강경선, 최석순, 곽헌 등과 함께 프랑스조계 한인교회 삼일당(三一堂)에서 6ㆍ10만세운동에 관한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첫 번째로 등단한 김단야가 국내 상황에 대해 연설하였다. 김단야는 국내의 조선공산당 간부로 이즈음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선생이 사회주의를 수용하는 데는 이들 상해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1920년대 후반 선생이 상해에서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을 무렵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념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독립운동의 통일적인 추진을 위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전개되었다. 선생은 1927년 중국 관내지역 유일당 촉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중국관내지역에서 조직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는 이러한 운동의 하나로서, 국내의 신간회, 만주의 유일당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상해 조선공산당 책임자인 홍남표, 여운형 등과 한국유일당 상해촉성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해촉성회에는 화동한국학생연합회, 상해한인학우회, 상해한인청년회 등이 가맹하였다.

그러나 유일당 촉성운동은 민족진영 내 좌우세력의 인식 차이와 당시 중국의 국공분열의 영향을 받아 해체되고 말았다. 1929년 상해촉성회가 해산되고 좌파세력에 의해 재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이 조직되었다. 선생은 동맹의 위원 겸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11월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으로 발전 해체될 때까지 선생은 독립운동자동맹 조직부장으로 김원식ㆍ곽헌ㆍ정태희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자 일국일당의 원칙에 따라 상해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선생은 상해에 거주하는 한인 공산주의자들로 조직된 중국공산당 강소성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프랑스조계지역) 한인지부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한편, 선생이 독립운동에 분주할 무렵인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급기야 다음해인 1932년 1월 ‘제1차 상해사변’이 발발하였다. 상해를 침략한 일본군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전승기념 및 천장절 경축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김구가 파견한 윤봉길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일본 군정요인 7명이 살상되었다. 윤봉길의 홍구공원의거는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들로부터 외면 받던 한국독립운동이 기사회생하는 중대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추격으로 1919년 이래 혁명근거지이던 상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는 상해를 탈출하면서 선생의 동행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미 폐병이 골수에 박혀 운신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김구의 제의를 따를 수 없었다. 중병으로 누워있던 선생은 부인의 부축을 받아 이웃 중국인 집에 피신하여 간신히 일본경찰의 체포를 모면할 수 있었다. 상해의 정세는 날로 엄혹해졌다. 일제는 상해에서 모든 항일구국활동을 엄격히 단속했으며 상해 한인들의 반일투쟁을 탄압했다. 지하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하나둘 체포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생은 1934년 3월 28일 상해에서 영면하였다. 국내시절 일경에 체포되어 당한 옥고에 상해에서 얻은 폐병이 겹쳤던 것이다. 44세의 한창 나이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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