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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부인이 평한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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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부인이 평가한 조선인

성리학의 본질인 리와 기, 그리고 한다. 시선의 초점은 이것이다. 성리학이란 인간의 몸과 마음을 닦고 성정을 바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데, 그 성리학을 배우고 닦고 실천윤리의 교지로 삼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왜 그토록 성리학과는 반대되는 인간성을 발휘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바로 우리 민족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의 한 가닥을 거슬러 올라가 파헤쳐보는 작업의 일환이다.

1592년은 임진년이고 바로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전해에 대마도 영주인 종의지가 선조에게 “명나라를 치려 하니 길을 빌려달라”는 일본 측의 의사를 선조에게 전했다. 그때 선조가 종의지에게 하는 말이 “작은 섬나라 일본이 큰 나라 명을 치려함은 달팽이가 큰 바다를 건너가려 함과 같고 벌이 거북이 등을 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종의지가 이 말을 그대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하자 히데요시가 대로하여 “내 조선 8도를 우리 군사의 말발굽으로 짓밟아 없애리라”고 하면서 전국 제후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런데 그때 히데요시의 아내는 남편의 조선 침공을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반대한 이유인즉슨 “조선은 산천이 험준하고 인걸이 많으며 자고로 오륜삼강이 밝은 예의지국이라 하며 백성마다 애국심이 강하다 하오니 쉽사리 처리되지 않으리라 믿나이다”고 남편에게 간언했다. 히데요시는 부인의 그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오히려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 부인은 다름 아닌 조선 침공의 제1선두에 섰던 왜장 가또 기요마사의 여동생이었다.

“오륜삼강이 밝은 예의지국”이라고 조선인을 평한 히데요시 부인의 말로 보아 그때 이미 일본 같은 외국에서도 조선인은 삼강오륜 같은 성리학의 교지에 밝은 민족으로 소문이 나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그때 이미 한국인을 평하는 시각은 두 가지로 갈려 있었다. 하나는 히데요시 아내가 말한 대로 “삼강오륜에 밝은 예의지국으로 애국심이 강한 사람들”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정 반대의 평도 있었다.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는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첫째, 한국인은 간사하고 교사하여 의심이 많고 항상 사람을 믿지 않으므로 역시 남도 나를 믿지 않는다. 둘째, 한국인은 비록 조그마한 일에도 경솔하게 떠들기 때문에 사람은 많아도 성취하는 일은 별로 없다. 셋째, 한국인은 많이 마시고 먹는다. 넷째, 관에 있는 한국인은…. 술을 때를 가리지도 않고 마신다.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한국인은 경솔하고 부정하여 백성은 관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선비는 대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부는 공경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신하가 서로 업신여기고 경알(傾軋)할 것만 생각한다. 경알이란 질투하기 위하여 책(策)을 돌려 남을 모함한다는 뜻이다.”

히데요시 부인은 일설에 의하면 절세의 미인인데다 천문, 지리, 의학, 복술 등에 능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식견이 꽤 높았던 모양인데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나 당시의 조선인에 대해서 상당히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재미있다. 그녀가 높게 평가한 것이 다름 아니고 바로 “삼강오륜이 밝은 예의지국과 애국심이 강한 국민”인데 반하여 같은 한국인인 성현은 한국인을 아주 저급한 인종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성현도 이름 있는 학자요 높은 관직에 나갔던 사람으로 임진왜란 백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한국인에 대한 이런 상반된 평은 왜 생기는 것일까? 성리학 논쟁의 전후를 잘 살펴보면 그 해답이 나올지 모른다. 왜냐하면 조선조 파쟁의 본격적 시작은 사단칠정론에서 시작된 동인과 서인의 패갈림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패갈림의 사단을 제공한 것은 퇴계와 율곡의 철학논쟁이었고 그 논쟁의 시단을 제공한 것은 퇴계와 기고봉, 두 사람이었다.

퇴계와 기고봉이 불을 지른 성리학 논쟁은 단순한 학술논쟁으로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율곡이 고봉의 주기(主氣)설을 지지하고 유성룡 등은 퇴계의 주리(主理)설을 지지함으로써 조선조의 정계는 율곡을 지지하는 서인노론과 퇴계를 지지하는 남인의 두 파당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것은 경기도 중심의 기호학파와 경상도 중심의 영남학파로 갈라서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조선유학사’를 쓴 현상윤 선생이 평했듯이 “그러고 본즉 300년간 대립 되어 있던 주리 주기의 2대 학파의 출발은 실로 퇴고(退高) 두 사람의 사단칠정에서 시작되었다 말할 수 있다”(조선유학사 p.95) 성리학 논쟁은 이미 말한 대로 당쟁에 몰입해있던 두 세력에게 명분을 제공하는 허울 좋은 구실을 주기도 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인간의 심성을 닦고, 훈련하고 그리고 성숙하게 하는 하나의 인성적 교리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성리학은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똑같이 한국인들에게 남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부인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성리학 논쟁은 인간의 본성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에 기초해서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발현되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쟁론의 초점이 주리설과 주기설이라는 두 가지 논점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종국에는 지역적 양분화와 정치와 정책적 쟁론의 이분화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이다.

쉽게 얘기하면 300년 이상 지속한 두 당파의 파쟁적 논쟁은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그리고 시와 비를 꼭 가려서 보려는 하나의 정치적 관성과 습성으로까지 발전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관성과 습성은 양반계급뿐만 아니라 일반 중인계급과 서민들의 행동양식과 그리고 생각의 패턴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우리 국민은 모든 문제에 칼로 무를 자르듯 양쪽으로 나뉘어서 싸움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이 이분법적 파쟁심, 옳고 그름의 중간을 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과 바르고 그름의 이분법적 시비논쟁으로 일관하는데 아마 세계적으로 한국인들을 따라올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유전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한국인들이야말로 파쟁심이란 ‘슈퍼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밈’은 도킨스의 말대로 물질적 DNA가 아니고 문화적 전이형태를 가진 비 물질적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의 심성적 원형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정치적 행위 중 가장 극단성을 띤 문화적 유전자는 당파성이 아닐까? ‘밈’중에서도 가장 큰 ‘수퍼밈’은 바로 파당성일 듯하다.

그런데 성리학이 가져온 유교적 폐해가 이런 점이 있는가 하면 우리 국민들의 그 유례없는 애국심의 발로라는 또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사실 왜정 때에도 국채 모으기 운동이 있었다. 국가가 위급한 처지에 빠졌을 때 생명을 내놓고 덤벼들 수 있는 애국심이 충만한 국민들이 한국처럼 많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이런 국민들의 기질과 인성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역시 성리학으로 다져진 윤리와 도덕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높은 심성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돌아가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임진왜란 전야에 벌어졌던 조정에서의 그 행태가 오늘날 우리 정치에서의 행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다 알다시피 임란 전에 우리 조선에서는 일본에 두 명의 사절을 파견해서 일본 사정을 정탐해 오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었다. 정사는 황윤길(黃允吉)이였고 부사는 김성일(金誠一)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정사인 황은 서인이요, 부사인 김은 동인이었다. 이 두 사람이 일본에 다녀와서 국왕인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람됨과 인상을 묻는 왕의 질문에 황은 “그 눈이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이더이다. 앞으로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으로 아뢰나이다.”이런 정사의 답변에 대해 부사인 김성일은 “그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도 오죽잖사오니 두려울 것이 못되는가 하옵니다.”왕에게 이런 보고가 있은 후 당시 식견이 높기로 그 명망이 자자하던 서애(西厓) 유성룡이 퇴계문하의 같은 동문이자 관직으로는 아래인 김성일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자네가 본 히데요시의 그 인상이 사실인가?”서애의 질문에 김성일은 이렇게 답했다. “말이야 황윤길 말이 맞네만 서인 말이 옳다고 하면 우리 입장은 무엇이 되는가? 그래서 다른 말을 한 것일세.”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김성일은 한낱 소인배로 보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김성일 같은 인물이야 그렇다 치고 유성룡 같은 군자요, 대인이요, 그리고 대정치가이기도 했던 그가 그 후에 보인 태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는 율곡의 ‘십만 양병론’에 대해 왕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설령 히데요시가 쳐들어온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줄 아옵니다.”선조도 평소 믿고 있던 유성룡의 이 말에 흔쾌히 따르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유성룡 정도의 정치적 식견과 금도를 가진 인물이 번연히 일이 잘못될 줄 알면서 이런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파쟁의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임란이 터지고 나서 의주로 피난을 가는 그 와중에 유성룡은 율곡의 그 선견지명을 몰라본 것을 통탄했다고 한다. 몰라본 것이 아니라 당쟁의 와중에서 당파적 이해관계에 휩쓸려 잠시 정치적 안목에 무엇이 씌웠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리학으로 생긴 파당심의 폐해는 유성룡 같은 현인조차 피해가기 어려웠다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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