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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한나라당이 더 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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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북한 소행인 줄 알았다. 천안함을 폭침시켜 나라의 안보를 위협하더니, 10·26 서울시장 선거 때는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테러해 선거 무력화 공작을 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북도 아니고, 정신이상자나 초등학생도 아니고,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9급 비서의 범죄사실이 ‘소명’됐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사이버 테러 터져도 책임회피만

국가기관에 대한 사이버테러를,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도를 뿌리째 흔드는 행위를 집권여당 의원 비서가 자행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본인은 부인한다. 한나라당도 당에선 누구도 연루되지 않았다며 선을 긋는다. 하지만 이런 불끄기가 안 통한다는 건 본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철저한 수사를 통해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말은 밥 먹으면 배부르다는 것처럼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수사결과가 발표된들 국민이 다 믿어줄지 의문이다. 정부여당과 함께 공권력에 대한 신뢰가 거의 바닥이어서다. 오히려 “출근길 젊은 층 투표를 방해하려 한 치밀한 작전”이라고 주장했던 인터넷방송 ‘나는 꼼수다’를 더 믿는 사람만 늘어날 판이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당 차원에서 개입한 것으로 드러날 경우 당이 문 닫을 만한 사건”이라고 했다. 개입이 없었어도 한나라당은 고개를 들기 어렵다. 내 집 강아지가 사람을 물면 주인이 책임을 지는 게 상식이다. 물린 사람은 아파 죽겠는데 나는 몰랐고, 물라고 시키지 않았으니 상관없다는 건 주인의 자세도 사람의 도리도 아니다.

지금 한나라당은 오물이 튈까봐 요리조리 피하는 지극히 ‘한나라당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 가면 한나라당 공천이 월계관 아닌 낙인이 될 판국인데 그들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 채 내년 총선 공천권 논쟁에 바쁘다. 자신이 공천과 선거에서 살아남아 다시 금배지를 다는 걸 세상 어떤 일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기주의자들의 집단이니 안철수 같은 사람이 뜨는 것이다.
미국이 옛 소련과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상황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역사란 이성적인 행위자뿐 아니라 비이성적인 ‘개새끼’에 의해서도 결정된다”고 했다. 우연과 우발적 잘못, 철부지의 돌발행동이 역사를 비틀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은 ‘리더가 어떻게 대처하느냐’다.

1980년대 이란-콘트라 스캔들로 미국 국민의 지지를 크게 잃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위기를 통해 미국의 국운과 자부심을 회복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스캔들이 잘못됐음을 인정했고 백악관에 특별조사기구를 설치했으며 조사보고서가 나오자 관련자 문책과 인사쇄신을 단행했다. ‘돌려막기 회전문 인사’가 아니라 대통령실장까지도 친분이 없는 유능하고 현명한 인물을 등용한 진짜 물갈이였다.

‘죽음의 儀式’부터 치를 때다

악재(惡材) 대응이랄까 ‘데미지 콘트롤’의 교본으로 꼽히는 레이건의 경우처럼, 사람이든 조직이든 위기 때는 죽음에 버금가는 과정을 거쳐야만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말 그대로 사즉생(死卽生), 죽을 각오라야 산다. 고대 수메리아의 왕은 매년 종교지도자에게 뺨을 때리게 해 권력의 오만에서 깨어나는 의식을 치렀다. “집권당도 새로 태어난다는 정치적 의지와 강한 도덕성을 보여야만 재집권이 가능하다”고 ‘좋은 권력, 나쁜 권력’을 쓴 지오프 멀건은 진즉 말했다.

한나라당 밥을 먹던 사람의 사이버테러 혐의가 불거진 날 홍준표 대표는 “당이 직접 관계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공당(公黨)을 책임진 집권당 대표로서, 국민에게 심려를 끼친 것만으로도 사과부터 해야 할 판에 최 의원에게 “책임지고 당에 피해가 없도록 잘 수습하라”고 떠넘겼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국민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아직도 모른다는 점에서 민심과 멀고도 멀다.

리더가 조직의 문제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지 않고, 죽기 살기로 해결할 의지도 보이지 않는 조직에 희망이 있겠는가. 대표가 그런다고 원로도, 중진도, 소장파도, 심지어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박근혜 의원도 잠자코 있는 당이 진짜로 살아있는 정당인가. 한나라당 소속 한 의원은 “연찬회를 보면서 아 드디어 한나라당은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동료의원에게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당이 절벽 아래로 이미 추락하기 시작했는데도 제 살 궁리에만 몰두하는 ‘정치 사업자’들이 모인 사업자 단체 수준이라면 한나라당의 수명은 끝났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켜내는 정당이 하나는 있어야겠기에, 헤어지기 전에 한번만 더 붙잡는 심정으로 제안한다. 홍준표가 대표답지도, 남자답지도 못한 모습에 바뀔 가능성이 이제 더는 없는 것으로 판명됐으면 박근혜가 국민 앞에 나서서 ‘죽음의 의식’을 치르기 바란다. 부활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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