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사

거상이 된 구두수선공…방한한 난춘후이 정타이그룹 회장

728x90
반응형

1999년 7월 미국 LA의 기자회견장. 중국에서 온 165㎝ 단신의 한 기업인이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중국 저장성 원저우(溫州)에서 온 정타이(正泰)그룹의 난춘후이(南存輝) 회장. 난 회장은 “원저우 기업의 95% 이상이 민간기업”이라며 “중국 정부가 민간기업을 억압하고 국영기업만 보호한다는 웨이징성(魏京生)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당시는 중국이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추진하고 있을 때로 중국의 최혜국 대우(MFN) 폐지 여부가 뜨거운 이슈였다.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만 보호하고, 외국기업과 민영기업을 억압한다. 중국의 개발도상국 ‘최혜국 대우(MFN)’를 취소해야 한다”며 다나 로라바커 의원(캘리포니아)이 주도한 ‘57호’결의안(案)의 미 하원 표결을 앞두고 있었다.

대표적 반(反)중국 의원인 로라바커의 결의안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힘을 실은 사람은 미국에서 망명 중이던 ‘중국의 민주화 투사’ 웨이징성이었다. 웨이징성은 마오쩌둥의 사망 직후 베이징에 마련된 ‘민주의 벽’에 ‘제5의 현대화-민주주의’란 대자보를 붙여 반향을 일으킨 반체제 인사다. 1978년 집권한 덩샤오핑(鄧小平)은 웨이징성을 ‘반혁명’ ‘정부 전복’ 등의 죄목으로 14년간 구금시킨 뒤 1997년 미국으로 추방했다. 이후 웨이징성은 미국에서 줄곧 반중국 목소리를 내왔다. WTO 가입을 목전에 두고 ‘최혜국 대우’ 폐지를 운운한 웨이징성은 중국으로서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 출장 중이던 난춘후이 회장은 이 같은 소식을 듣고 중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난춘후이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정타이그룹은 15년간 경영한 100% 내 회사다. 1998년 기준으로 정타이그룹은 20억위안(당시 3억달러)의 기업이다. 중국 정부의 제한과 차별대우를 받았다면 수만위안으로 시작한 작은 기업이 10년 만에 이 정도 성장할 수 있겠냐. 내 고향 원저우는 95%가 민간기업이다. 못 믿겠다면 원저우로 직접 와봐라. 미 의회 증언에도 내가 직접 나가겠다”며 강하게 논박했다.

난춘후이 회장의 기자회견 덕분에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취소하자”는 결의안의 미 하원 채택은 결국 무산됐다. 그리고 2001년 중국은 WTO에 가입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민영기업의 메카로 불리는 ‘상도(商都)’ 원저우도 당시 난춘후이 회장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전 세계에 각인됐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로스앤젤레스 사건’으로 전설처럼 회자된다. 당시 기자회견을 계기로 난춘후이 회장은 중국의 권부인 중남해(中南海)의 신임을 받는 민영기업가가 됐다. ‘로스앤젤레스 사건’ 이듬해인 2000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원저우로 직접 내려가 정타이그룹을 찾았다. 이후 리펑(李鵬) 전인대 상무위원장(전 총리)을 비롯해 주룽지(朱鎔基) 총리,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원저우행도 줄줄이 이어졌다.

난춘후이 회장은 지난 7월 3일 시진핑(習近平) 당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방한에도 함께 동행했다. 시 주석 방한 이튿날인 지난 7월 4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중경제통상협력포럼에서도 중국 기업인을 대표해 스피커로 나섰다. ‘한·중경제통상협력포럼’에서 마이크를 잡은 중국 기업인은 딱 3명. 톈궈리(田國立) 중국은행 회장과 리옌홍(李彦宏) 바이두 회장, 난춘후이 정타이그룹 회장이다. 중국은행은 중국 최대 외국환 은행이고, 바이두는 중국 최대의 검색엔진이다. 비교적 생소한 난춘후이 회장이 마지막 스피커로 나서자 한국 기업인과 기자들은 경제통상협력포럼이 열린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일찍 철수했다. 하지만 중국 기업인들은 난춘후이 회장이 10분간의 연설을 마치자마자 그에게 물밀듯이 몰려가 명함을 주고 사진을 찍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난춘후이 회장은 1963년 중국 저장성 류스(柳市)에서 태어났다. 류스는 구강(?江)을 사이에 두고 원저우와 남북으로 마주한 시골마을이다. 난춘후이 회장의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13살 때 부친이 갑자기 병이나 입원하자 졸업 15일을 앞두고 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뛰어든 것은 아버지가 하던 구두수선일이다. 원저우 일대는 중국 피혁 구두산업의 메카다. 난춘후이는 무려 3년을 구두수선 상자를 들고 골목길을 누볐다.

1984년 난춘후이 회장은 세 명의 친구와 동업해 변압기와 퓨즈 등을 취급하는 저(低)전압 전력기기 가게를 차렸다. 마침 원저우에서는 변압기 등 저전압 전력기기를 아이템으로 한 창업 열풍이 불었다. 사업밑천은 대다수 원저우 상인들처럼 집을 담보로 이곳저곳에서 빌렸다. 다른 원저우 상인들과 달리 난춘후이는 일찍부터 품질관리에 주력했다. ‘중국의 유대인’으로 불리는 원저우는 ‘짝퉁’의 대명사로, 종종 ‘짝퉁 화형식’이 열리는 곳이다. 하지만 난춘후이는 “1억위안(약 180억원)의 불량품을 포기할지언정 불합격 상품을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 삼았다. 1994년 원저우 기업 최초로 ISO 9001 인증도 획득했다.

그는 대개 가족경영을 통해 ‘전점후창(前店後廠·앞은 가게 뒤는 공장)’ 식으로 경영해온 다른 상인들과 달리 일찍이 가족경영 방식에서도 탈피했다. 2007년 미국에서 공부한 아들이 “정타이그룹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는 “고생을 더 하라”며 거부했다. 결국 ‘짝퉁’ 등 품질문제 등으로 원저우 기업들이 줄도산할 때 정타이그룹은 끝까지 살아 남았다. 난춘후이 회장은 “3년간 구두수선을 하면서 성실이 사람의 도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품질 좋고 저렴하면 시장이 있다. 작고 평범한 일부터 중시해야 한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정타이그룹은 직원수 3만명에 매출 300억위안(약 4조9000억원)을 올렸다. 매년 중국의 부호 순위를 발표하는 포브스에 따르면 난춘후이 회장의 개인재산은 2013년 기준으로 62억8000만위안(약 1조245억원)에 달했다. 최근에는 원저우 기업들을 이끌며 원저우 최초의 민영은행 설립도 주도하고 있다. 기존의 저전압변압기 사업을 기반으로 최근 태양광 사업으로 사업영역을 다각화하고 있다.

그는 한국 현지법인 설립과 한국 대기업과의 합작 등을 통해 한국 진출도 가속화하고 있다. 정타이그룹은 2009년 아스트로너지솔라코리아라는 한국 법인을 설립해 한국 곳곳에 태양광발전소를 구축하고 있다. 2010년 3월과 5월에 충남 부여와 경북 군위에 1㎿급 태양광발전소를 세웠다. 2012년 6월에 전남 고흥군에 25㎿급의 태양광 설비를 설치했고, 지난해 4월에도 강원도 횡성군에 1㎿급, 지난해 12월에는 강원도 춘천에 9㎿급 태양광발전소를 구축하는 등 대한(對韓) 투자를 늘려왔다. 정타이그룹의 홍보담당자는 “태양광발전소로 직접 전력을 생산한 뒤 한국전력에 판매해 수익을 올리고 투자비를 상환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2012년에는 한국 대기업과 함께 불가리아 등 제3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난춘후이 회장은 한·중경제통상협력포럼에서도 한국 기업의 경쟁력으로 ‘창조력’ ‘실행력’ ‘국제감각’을 꼽으며 추가 합작 가능성도 시사했다. 난춘후이 회장은 “불가리아의 48㎿ 태양광발전소는 현대엔지니어링, LG CNS, LS산전과 함께 3개월 만에 준공했다”며 “같은 시기 착공한 다른 프로젝트보다 훨씬 더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고 말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