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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AD 1년, 10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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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ad : 1 an... et 10 de plus ! [27.01.2011 12:27]

2010년 1월 27일로 스티브 잡스가 Le Corbusier LC3 소파 위에 앉아 아이패드를 선보인지 1년이 되었다. 잡스는 이와 동시에 10여년에 걸친, 태블릿의 여러 가지 개념과 애플 태블릿에 대한 루머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아이패드는 관측자, 사용자, 어쩌면 애플 자신의 예측마저도 초월하였다.

Dynabook : iPad, je suis ton père

태블릿 개념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스타일러스로 글씨를 쓸 수 있는 전자 슬레이트였던 1888년 7월 31일의 엘리샤 그레이(Elisha Gray)와 그의 특허 (#386.815)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지난 날의 이메일인 전보 메시지의 전송을 위한 기구가 그의 특허였다.

태블릿 모양의 컴퓨터로서 나온 최초의 기기는 분명 다이나북(Dynabook)이라 할 수 있겠다. 제록스 PARC의 앨런 케이(Alan Kay)가 1968년에 처음 개념을 소개하였으며, 모든 나이대 어린이를 위한 개인용 컴퓨터로서 1972년에 소개 글도 쓴 바 있다. 다이나북은 아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로서, 케이는 컴퓨터를 교육용 도구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아이들이 정보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령 문제 해답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을 아이들이 다이나북으로 할 수 있다는 개념이었다.) 태블릿 포맷은 단일한 몸체로 만들기 때문에 상당히 견고하며, 다이나북은 무선 네트워크를 장비하는 개념이었다.


앨런 케이가 들고 있는 다이나북 모델 (카드보드지로 만들었다!)

다이나북은 개념 이상 발전하지 못 하였지만 이 개념은 OLPC 프로젝트에서 보다시피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애플이 개발하고 상상한 여러 가지 제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블릿 개발을 위해 앨런 케이는 애플에서 13년간 일하였다.

애플에서 나온 태블릿 컴퓨터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1983년 Frog Design에서 나왔다. 당시로서는 실제로 판매할 제품이 아니고, 애플의 미래 제품 디자인을 상상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서, 10년 정도 애플이 사용한 디자인 언어인 백설공주(Snow White)가 여기에서 나왔다. 진한 아웃라인으로 둘러싸인 하얀색 케이스가 "백설공주" 디자인이다.


Le Bashful, premier concept de tablet computer Apple. Il servit notamment à fixer le design de l'Apple II.

애플에게 정기적으로 컨설팅을 받는 Frog Design은 같은 맥락에서 다른 개념도 상상하였다. 24HourMac (1984)은 키보드와 스타일러스가 있는 태블릿으로서, 액정 디스플레이가 터치형이었다. BookMac (1985)은 전화가 달린 태블릿 매킨토시였다. 이들 모두 다이나북과 매우 유사한 구조였다.

Sculley : Newton, retour vers le futur

매킨토시의 실패라는 명목으로 잡스가 떠난지 얼마 안 있어서, 존 스컬리가 애플 CEO가 되었다. 스컬리는 애플을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았고, 태블릿 포맷에서 그 길을 발견하였다. 그는 매킨토시가 그래픽 인터페이스와 마우스로 변화를 가져왔듯, 태블릿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다.


Maquette du Knowledge Navigator.

그래서 태어난 것이 피가로(Figaro)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개인용 비서의 개념으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경쟁을 시켜가지고 나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1987년에 나온 "Knowledge Navigator" 비디오를 보시라. 영상에는 2010년으로 나와 있다.


1990년과 1991년 사이, Guigiaro 혹은 Smart Design과 같은 애플 내부의 태블릿 프로젝트는 스타일러스를 갖추고 있었고, 이 프로젝트는 나중에 Newton Plus로 바뀐다. 마지막 Montblanc으로 바뀐 이 태블릿의 판매가는 4~5천 달러를 호가하였고, 1992년에 팔기에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스컬리는 동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개념이었던Newton Junior 프로젝트를 살린다. 1992년 말, 첫 번재 개념인 Newton MessagePad Batman 준비가 끝난다.


Un des concepts Figaro.

1991년 말부터 1993년 초 사이 뉴튼 팀은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첫 번째는 들어가게 될 프로세서였다. AT&T Hobbit 프로세서는 강력하지만 비쌌다. 그래서 애플은 Acorn과 VLSI, 그리고 애플 간의 합자회사였던 ARM 프로세서를 선택한다. 둘째 문제는 크기였다. 사실 어떠한 뉴튼도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지는 못 하였지만(PCMCIA 포트때문에 소형화가 불가능했다.), 뉴튼 팀은 주로 뉴튼의 모양에 맞춰서 작업을 하였다.


Figaro Montblanc.

세 번째(아마 제일 중요한) 문제점은 내부 프로젝트 간의 경쟁이었다. 뉴튼이 1993년 8월, MessagePad 100으로 현실화되면서 매킨토시 팀도 여러가지 태블릿 개념을 선보인다. 이들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뉴튼 OS가 아닌 맥 OS를 사용하면서 모듈화(탈착 가능 키보드에 스테이션 시스템으로서 완전한 맥이 될 수 있었다)를 이루었다는 특징이다.


Newton Batman.

1992년 여름에 내부적으로만 나왔던 Folio가 있다. 이 모델이 제일 끝까지 간 모델이랄 수 있다. 이 모델은 Tangerine의 디자이너인 조나단 아이브(Jonathan Ive)의 디자인이었으며, 당시의 Tangerine은 파워북 디자인을 위해 애플에게 컨설팅을 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애플은 최초의 파워북은 물론 MessagePad 110/120/130, Spartacus의 디자인도 Tangerine과 같이 하게 된다. 조나단 아이브가 애플 산업디자인부의 수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한 일이기는 하다.


태블릿 맥의 생태계 프로젝트이다. 모니터는 태블릿 그 자체이고, 스타일러스를 갖추고 있으며, 키보드와 트랙패드를 갖춘 전통적인 컴퓨터로 변모하기 위한 독스테이션에 연결시킬 수 있다. 바로 이 독스테이션에 주변기기 드라이버를 연결할 수 있는 형태다.

태블릿에서 애플이 마지막으로 발족시킨 프로젝트는 스티브 잡스가 복귀하기 이전, 1993년 당시의 MessageSlate 프로젝트였다. 메시지패드를 "대형"화 시킨 버전으로서, 생산 직전까지 갔던 최초의 컨셉, Bic은 내부적으로 50대가 안 되는 대수만 생산되었다. 뉴튼의 아버지인 존 스컬리가 CEO를 사직, 1993년 10월 15일 애플을 떠났기 때문이다. 메시지패드의 여러 가지 모델들도 실패를 거듭한 끝에 1998년 2월 중단된다. 그와 동시에 뉴튼 프로젝트는 애플의 자회사 Newton Inc.이 되기도 한다. 애플에서 권력을 쥔 다음, 스티브 잡스는 애플 내 조직도와 카탈로그에서 뉴튼 프로젝트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

iPad : les aventuriers de la rumeur perdue

애플 태블릿 아이디어는 재빠르게 부활하였다. 2002년 11월, eWeek의 로덴버그(Matthew Rothenberg)는 맥오에스텐과 PowerPC를 사용하는 8인치 짜리 태블릿에 대해 거론하면서 2004년에 나타나리라 보도하였다. 실제로 2004년 개념도로서 태블릿 모델이 나타났다. (2004년 3월 17일, D504,899) 2005년 5월 10일에 획득한 특허 그림을 보면 아이북과 유사한 태블릿 그림이 나타나 있다. 이 태블릿에는 키보드가 없었다. 이 때부터 기나긴 태블릿 루머가 시작되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인텔 프로세서와 태블릿용으로 맥오에스텐을 수정한 오에스텐을 사용하는 태블릿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미 애플은 이 당시 아이패드의 작업을 시작해 놓은 상태였다. 스티브 잡스도 D8 컨퍼런스의 쉬는 시간에 확인을 했었다. 뉴튼 프로젝트와는 달리 K48 프로젝트는 스타일러스를 사용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선보인 tablet PC와도 달랐다. 잡스의 당시 설명이다. "키보드 없이 손가락만으로 타이핑하는 아이디어를 냈죠. 그래서 팀에게 멀티터치 스크린을 가질 수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래야 손을 이용하여 타자칠 수 있으니까요." 잡스는 이 아이디어를 "2000년대 초"부터 갖고 있었다고 말했었다. 본지 정보에 따르면 2004년부터 그의 아이디어가 나왔었지만 말이다.


아이포드를 선보인 이후, 애플은 휴대폰을 따로 만들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잡스는 일단 태블릿 개발 정지 결단을 빠르게 내린다. 그리고는 프로젝트로 얻은 기술을 휴대폰 개발에 투입한다. 공급업체들은 애플에게, 부드러운 스크롤링과 같은 인터랙션이 가능한 화면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해 주었다. 비록 처음에는 파리에서 발족한 Purple 프로젝트의 진보적인 소프트웨어를 통하여 리눅스 기반 아이포드을 만들고, 여기에 전화 기능과 웹 내비게이션 기능을 붙이는 정도의 개념이었지만, 애플의 Purple 2 프로젝트는 K48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백지 상태로 새출발한 것이었다. 애플은 가상 키보드와 멀티터치를 전문으로 하던 기업 FingerWorks의 지재권과 인력을 인수한다. 그리고 2007년 아이폰이 나왔다.


@ Engadget

그러자 루머가 다시금 빠르게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2009년, AppleInsider는 "3G를 갖춘 대형화된 아이포드 터치가 될 것이며 2010년 초에 데뷔하고 가격은 $700 대, 프로세서는 ARM"이라는 보도를 하였다. 거의 맞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애플 태블릿이라면 역시 Axiotron Modbook처럼 맥 태블릿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2010년 1월 27일에 선보인 짐승은 사못 달랐다.

tablettes : la nouvelle génération

아이패드는 이렇게 긴 역사를 물려받았다. 애플은 Acorn, VLSI와 함께 ARM을 만드는데 기여하였고, 여기서 나온 ARM6가 메시지패드 안에 장착되었다. 또한 PA Semi와 Intrinsity를 인수하고 삼성과 함께 아이패드용 A4 칩을 만들게 되면서 최고의 ARM 전문가들이 애플에 들어갔다. 또한 뉴튼 OS 태블릿 프로젝트와 맥오에스 프로젝트 사이에서 일어났던 갈등은 아이패드용 iOS로 풀었다. 이 때문에 아이패드가 "거대한 아이포드 터치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리라는 관측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아이패드를 구입한 이들은 그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애플이라면 "마술과 같은, 혁명적인" 태블릿을 만들었으리라는 점에 확신하였다. 보다 자연스럽고 친밀하며 개인용 컴퓨터에 더 가까운, 사용자 앞에 놓인 장벽을 없앨 기기가 아이패드였다.

처음 미국에서만 팔린 아이패드는 4월 3일, WiFi 버전, 4월 30일, 3G 버전 두 가지로만 팔렸고, 머나먼 조상, 뉴튼에게 바치는 오마쥬의 광고를 동반하였다.



하지만 유사성은 거기서 끝이다. 뉴튼의 이상형(휴대성과 개인용 비서 등)은 아이폰과 아이포드 터치가 구현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는 표준 포트를 갖춘 개방형 생태계, 필기인식을 대표하는 스컬리 PDA의 개념과는 다르다. 따라서 아이패드가 뉴튼(혹은 뉴튼 태블릿 개념)의 적장자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1990년도의 애플은 뉴튼을 사무실에, 길거리에 풀어놓고자 하긴 했지만, 2010년의 애플은 아이패드를 소파 위에 올려 놓으려 한다.

뉴튼은 실패였다. 하지만 아이패드는 의심의 여지 없는 성공작이다. 애플의 모습도 그 때보다 크게 달라져서 비교가 불가능할 지경이다. 아이패드는 시판에 들어간지 첫 날만에 30만 대를 팔았다. 한 달 뒤에는? 백 만 대였다. 한 달 뒤 9개국에서는? 백 만대가 더 팔렸다.

분기당 애플은 330만 대의 아이패드를 팔았으며, 석 달 후가 되자 419만 대, 1년이 지나자 1,480만 대가 팔렸다. 분석가들 예상은 300~350만 대 정도였으니 예측치의 다섯 배가 팔린 것이다.


아이패드는 빌 게이츠가 내세웠던 스타일러스와 tablet PC와 거리가 멀고, 다소 희미하지만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다. "미디어 태블릿"이라는 의견도 있고(태블릿 시장의 90%가 미디어용이다), 맥처럼 개인용 컴퓨터라 하는 이들도 있다. (애플은 델 다음으로 세계 3위의 개인용 정보기기 업체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패드의 화면은 크다. 그리고 대단히 많은 콘텐트를 거느린(아이패드 전용 앱만 해도 6만여 가지가 넘는다) 아이튠스 스토어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아이패드는 주로 언론사와 출판사에게 희망을 안겨다 주었다. 앱스토어는 물론 아이북스토어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또 실망하는 분위기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한 말과는 달리 현실로 되돌아왔다고 할 수도 있겠다. 바로 여기서 애플이 도전해야 한다. 애플은 실적 이상으로 자신의 모델을 증명하였고, 튼튼하며 건강한 상태이다. 또한 캐쥬얼 게임 신생 기업들은 물론 여러 기업들의 야망적인 프로젝트, 콘텐트의 목표가 바로 애플이다.


간단히 말해서 애플 내에서 오랜 역사를 이어 받은 아이패드는 한 사이클의 끝에 나타나서 새로운 사이클을 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이패드의 형태가 일시적인 유행일까, 아니면 지속적일까? 맥과 아이패드의 경계가 점점 허물어지는 가운데, 다시금 애플이 컴퓨터의 정의를 과연 바뀔 것인가? 우리와 가까운, 그리고 단순한 의문도 하나 있다. 아이패드 2에는 혹시 레티나 디스플레이가 장착될까? 당장일까, 아니면 나중일까?

Quelques références 본 기사 첫 번째 페이지 사진은 폴 컨켈(Paul Kunkel)의 AppleDesign : The Work of the Apple Industrial Design group, Watson-Guptill, New York, 1997의 이미지들이다. 뉴튼에 대해서는 Message-Pad.netRandOM 사이트를 참조하였다. 아이패드가 나오기 전의 루머들은 iGeneration 사이트의 tablette Apple을 참조하였다.


Anthony Nelzin
anthony(arobase)A_ENLEVERmacgeneration.com
Cet article peut être consulté à cette adresse :
MacGeneration.com - iPad : 1 an... et 10 de plus !

© 1999 - 2011 MacGeneration - L'essentiel du Mac en franç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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