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몰락 과정에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적으로 작용했다. 뿌리 깊은 고질병이 워낙 복잡하게 얽힌 탓에 누구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자신 있게 제시하지 못할 정도다. 이 때문에 설령 그리스가 채권단과 극적 합의를 이뤄 3차 구제금융을 받고 유로존에 잔류하더라도 그리스 위기는 언제든 재발(再發)할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반대로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해 독자 생존을 모색하더라도 바닥으로 추락한 국가 경쟁력을 회복할 길은 난망하다. 그리스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①올리브 수출해 올리브 가공품 수입… 기형적 산업구조 '그리스의 비극'
제조업 5.7% vs 서비스업 90%
많은 그리스인은 "유로존이 그리스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원망하지만, 사실 2000년대 초·중반 그리스인들은 유로존의 우산 아래서 좋은 시절을 보냈다.
유로존 가입을 전후해 다른 유로 국가에서 투자가 밀려들면서 그리스의 자금 조달 비용은 급격히 낮아졌다. 이런 값싼 자금 덕분에 그리스 경제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유로존 평균을 웃도는 연평균 4%의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 ▲ 그리스 앞날 어찌될까요 -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 연금 대폭 삭감 등을 감수할 것인가, 극심한 경제적 혼란이 뒤따르겠지만 채권단의 요구를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그리스에서 5일(현지 시각)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3일 수도 아테네에서“반대(Oxi)표를 던지자”고 주장하는 시민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AP 뉴시스
하지만 이 시기 그리스인들은 산업과 경제의 구조 조정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기보다는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렸다. 이 때문에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은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졌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는 경제에서 공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GDP의 50%로, 매우 높다. 또 산업구조를 보면 제조업 비중이 5.7%로 매우 낮고, 관광·해운업으로 대표되는 서비스업 비중이 90%로 지나치게 높다. 그 결과 임금 근로자보다 자영업자 비중이 큰 경제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나마 존재하는 제조업은 담배 제조, 식료품 가공 등에 불과해 자동차, 가전제품, 대부분의 소비재 등은 외국에서 수입해 쓴다. 그 결과 수출보다 수입이 훨씬 많은 무역수지 적자 구조다.
2000년대 호황은 이런 불균형을 바로잡을 황금기였지만, 개혁이 미진한 바람에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 경쟁력 순위에서 그리스는 2001년 36위에서 2014년에는 81위로 떨어졌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그리스는 세계 최고 해운업 국가인데도 정작 조선업은 없고, 세계에서 손꼽히는 올리브 생산국이면서도 그걸 가공할 인프라가 없어 올리브 열매를 수출해서 가공 올리브를 수입하는 기형적인 구조"라며 "결국은 제조업이 자본주의의 꽃인데 이걸 너무 소홀히 하다 보니 나라 경제가 정상으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②유로존 초기 통화절상에 '부자' 착시… 쌍둥이 적자도 심화
유로 단일통화 '양날의 칼'
유로존 가입 초기에 통화 가치가 자연스럽게 절상되면서 자산 가격과 소득이 올라가는 착시 효과가 발생했다. 그리스인들은 이 효과를 만끽하면서 부자가 됐다는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유로존 다른 나라와 경쟁력의 격차가 벌어지면서 단일 통화의 부작용이 점차 드러났다. 그리스의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는 2000년 3.6%에서 2008년 14.9%로 확대됐다. 보통 국가라면 경상수지 적자가 발생할 때 자국 통화 가치가 하락해 적자가 자연스럽게 감소하지만, 단일 통화에 묶인 그리스는 그럴 수가 없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싼값에 국채를 발행해 경상수지 적자와 정부 지출을 충당했고, 그 결과 무역 적자와 재정 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심화됐다.
유로화는 '올림픽의 저주'에도 한몫 거들었다. 그리스 정부는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되살리겠다"며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유치하고 경기장 건설 등 인프라 투자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다. 이를 통해 관광객 수입을 크게 늘리겠다는 계산이었지만 유로존 가입 후 물가가 오르는 바람에 관광 경쟁력이 크게 떨어졌고, 올림픽 시설들은 쓸모없는 애물단지가 됐다.
상황이 이런데도 다른 유로 국가와 글로벌 투자자들은 '유로존'의 힘을 과신해 그리스를 낙관적으로만 바라봤다. 글로벌 금융 위기 전까지 그리스 국채와 독일 국채는 금리 차이가 거의 없었다. 결국 한 나라 경제의 이상 징후를 알리는 체온계 역할을 하는 '환율'과 '금리' 어느 쪽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③대학 못간 고교생 국비 해외유학 등 퍼주기식 복지 남발
복지만 북유럽 따라하기
전문가들은 그리스에 망조가 들기 시작한 해로 1981년을 꼽는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내줄 것"이라고 약속한 사회당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취임한 해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정부 지출을 늘려 의료보험 혜택을 전 계층으로 확대하고 평균임금 및 최저임금을 대폭 끌어올렸다. 직원을 함부로 해고하지 못하도록 노동법을 개정했다. 대학을 가지 못한 고교 졸업생은 국비로 해외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국민이 퍼주기식 복지에 맛을 들이자 다시 바꾸긴 어려웠다. 우파든 좌파든 집권을 위해 더 많은 복지를 남발했다. 그 결과 그리스는 유로존 국가 중 가장 후한 연금 제도를 구축했다. 위기 직전까지도 국가총생산(GDP)은 독일의 10분의 1에 못 미쳤지만 GDP 대비 연금 지출은 독일(12%대)보다 높은 17.5%였다. 연금 수령액은 은퇴 직전 소득의 95%에 달해 독일(42%), 프랑스(50%)를 훨씬 웃돌았다.
④정치인·관료·노조, 조폭처럼 서로 뒤봐주기… 연금·임금인상과 지지표 맞교환
정치인·공무원 부패 최악
그리스 정치인들은 북유럽 수준의 복지 국가를 유지할 능력은 전혀 없었다. 정치인·관료 계층은 노조와 지역 이권 집단을 설득해 정책과 표를 맞교환하는 식으로 자리를 유지했다. 마치 두목과 부하가 서로의 뒤를 봐주듯 하는 '후견주의(clientelism)'가 발달한 것이다. '파켈라키(fakelaki·촌지)'와 '루스페티(rousfeti·정치적 특혜)'는 그리스 위기를 설명하는 두 단어다.
공무원 집단과 대형 노조는 정치인들로부터 임금 인상과 연금을 보장받는 대신 지지를 약속했다. 공공 부문은 점점 비대해져 2000년대 노동인구 4명 중 1명(85만명)이 공무원이었다. 공무원은 대개 아침 8시 반에 출근해서 오후 2시 반이면 퇴근했다.
후견주의는 탈세와 착복이 난무하는 지하경제를 양성했다. 유로존 위기 전 그리스의 지하경제는 GDP의 25%를 넘었다. 그리스 조세 당국은 그동안 국민 실질소득의 30%밖에 세금을 매기지 못했다. 2009년 그리스의 탈세액은 약 2000억~3000억유로로, 그해 재정 적자의 3분의 2에 달했다. 2010년 국제투명성기구는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이어 그리스가 유럽연합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라고 평가했다.
⑤1821년 독립후 총 5번 디폴트… "국제사회가 알아서 해주겠지" 국민들 나몰라라
간 큰 채무자들
디폴트에 관한 한 그리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세기 초 오스만제국에서 독립한 이후 그리스는 이번까지 총 다섯 번의 디폴트를 경험했다. 직전의 디폴트는 대공황 때인 1932년이었다. 1821년 독립 후 200년이 안 되는 기간의 약 절반을 디폴트 아래에서 보냈을 만큼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에게 국가 부도 선언은 낯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 2010~ 2011년 그리스 디폴트 위기 당시 국제사회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스를 구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것도 그리스 국민들은 알고 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간 큰' 채무자가 됐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은 "IMF(국제통화기금)나 ECB(유럽중앙은행)가 그리스에 대해서는 서구 문명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봐주고 있는 측면이 있다"며 "유로존 단일 통화로 묶인 상태에서는 성장을 일으킬 수 없는 만큼, 그리스로서는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결코 나쁜 선택인 것만도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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