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가 한국 극장가를 휩쓸고 있다.
'광해'는 가짜 광해군이 존재했고 이 광해군이 진짜 광해군을 대신해 정사를 보실핀 기간이 있다라는 상상에서 시작된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역사논란 평가는 상반되는데 이는 '광해'를 바라보는 현시대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왕이 됐지만 쫒겨난 '광해'는 매우 흥미로운 인물이다. 1980년대 이전까진 광해=폭군이란 인식이 강했지만 이후 그가 보여준 서민정책과 외교정책이 부각되면서 '개혁군주'로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광해를 명군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반대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기도 하다. '광해'라는 인물은 사극이나 영화, 소설 등에도 각기 다른 얼굴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광해만큼 '팬'과 '안티'를 함께 가진 역사 인물도 적을 터다.
영화 '광해' 속 진짜 광해는 폭군이다. 하지만 드라마 '이순신'을 비롯 여러 사극 속 광해의 모습은 총명하고 백성을 아끼는 명군이다.
광해는 진짜 어떤 인물이었을까.
광해는 명군이었다?
● 조선왕실의 '서자' 컴플렉스
광해군을 논하기 전 당대 조선왕실을 휩쓸던 '서자' 컴플렉스를 인지해야한다. 광해군 부친인 선조는 서자출신이다. 선조는 재위내내 이 '서자' 컴플렉스에 심각하게 빠져 살았다.
광해군 역시 서자다. 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기까지,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곁었다. 선조는 물론 광해군 역시 이 서자 컴플렉스로 인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서자 출신이던 선조는 적자가 아닌 광해군을 매우 탐탐치 않게 여겼다. 적자 영창대군이 생기자 광해군의 문안도 받지 않았다는 일례가 대표적이다).
광해군이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왕권 강화에 몰두한 이유를 이 '서자' 컴플렉스에서 찾는 학자들이 많다.
● 임진왜란의 영웅, 민중을 이끌다
광해군은 백성들에게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는 '중국으로 도망갈' 궁리만 했다. 첫째 임해군과 동생 순화군은 말만 의병을 장려했을 뿐, 가는 곳마다 패악을 저질러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이들을 잡아 오히려 일본군에 바쳤다.
이런 가운데 유일하게 세자 광해군 만이 분전했다. 분조(전시에 왕실을 나눠 나라를 운영하는 체제)활동을 펼치며 의병을 응원하고 장려했다. 관군과 의병의 조직화를 이루고 이끈 광해군이다. 의병장 김천일과 곽재우 역시 이런 광해군의 '팔' 역할을 해냈다. 전쟁에서 지휘계통의 일원화는 매우 중요하다. 개별 게릴라는 초반 타격은 줄수 있어도 한계가 있다. 조선이 '명줄' 호남을 지킬수 있던 점도 이순신 권율로 대표되는 관군과 김천일 등의 의병들이 양동작전을 펼치면서 가능해졌다. 이 조직의 정점엔 광해군이 있었다.
동궁분서유서엔 "나라 존속과 멸망이 그대들이 적을 죽이는데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라"는 광해군이 의병장 김천일에 보낸 편지가 기록됐다. 함경도에서 시작된 광해군의 분조활동이 나중엔 전라도 전역까지 퍼졌다.
이런 광해군의 대활약에 명나라도 감탄했다. 일국 왕으로서 도망만 다니는 선조에 질력이 났던 명나라다. 황제는 조선에 칙서를 내려 "(광해군에게) 전라 경상도의 군사 총독을 맡겨라" "부왕의 실정을 만회해 종사를 보존토록해라"고 응원했다. 종주국 역할을 하던 명나라가 선조보다 광해군을 실질적인 왕으로 인정한 셈이다. 가뜩이나 전쟁통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올린 선조의 질투와 미움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 왕이 된 광해, 친서민 개혁정책을 펴다
우여곡절 끝에 광해는 왕이 됐다. 뒤늦게 태어난 늦둥이 동생 영창대군이 적자이라는 점, 선조의 마음이 영창대군에 쏠려있었던 현실에서 선조가 갑작스레 승하했기에 가능한 '천운'이었다.
왕이 된 광해는 당시 조선백성들에게 민심을 얻고 있었을 터다. 이런 광해는 전쟁터를 몸소 다니며 민중들의 참상도 겪었을 터다. 이런 강해군이 내놓은 정책들은 '파격적'일 정도의 친서민적이었다.
대동법은 그야말로 '조세혁명'이었다. 공납을 쌀이나 포로 받는 정책을 실현시켰다. 특산물에 대한 양반들과 방납자들이 중간에서 거두는 '유통비용'을 절감시켰다. 이는 결국 돈 있는 자는 '더', 없는 자는 '덜' 내는 효과로 이어졌다. 당시로는 상상하기도 힘든 조세 개혁이었다. (대동법은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조세개혁으로 평가받는다)
(예를 들자. 인왕산에 호랑이가 산다고 인근 백성들이 호랑이 가죽을 쉽게 구할 순 없다. 양반이나 방납배들은 이런 지방특산물을 대신 구해주는 대신 백성들에게 과도한 웃돈을 받았다. 백성들이 내야할 '금액'에 이 지방특산물을 구하거나 제작하는 비용이 더해지고 이를 대신 유통해주는 비용이 더해진다. 방납의 폐해는 당시 양반들도 인정하던 바다)
이는 양반사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고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는 100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양전사업과 호구조사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으로 농토의 1/3이 줄었다. 광해군은 폐허와 토지 개간으로 농토를 늘리는 양전사업을 크게 벌였다. 호구 조사 역시 마찬가지다. 비정상적인 호구를 악용해 농민을 노비화 시키거나 사유화시키는 양반의 행포를 막을 수 있었다. 물론 두 사업은 국가 수입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실행됐으나 서민들에게도 유리할 수 밖에 없는 정책이었다.
이 외에도 '동의보감'을 전국에 배포하고 의료원을 다수 설치, 백성들의 건강에도 신경을 쓰게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다. 허균의 '홍길동전'도 이 때 만들어졌다.
● 천재적인 외교가 "힘이 있어야 중립도 있다"
학계에서 광해군을 평가할 때 가장 높은 점수를 주는 대목은 중립외교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국가 생존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 의리를 지켜야한다는 대다수 여론을 묵살할 수도, 그렇다고 강력한 군사력의 후금을 등을 돌릴 수도 업었다.
광해군은 통역가 출신 강홍립을 총대장으로 삼아 1만2천명의 군사를 원군으로 파견했다. 전투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조선군은 후금과 전쟁을 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명나라 군이 패퇴하자 강홍립은 곧바로 후금에 투항했다. "후금과 싸움은 조선의 뜻이 아니며 왕의 뜻을 받아 항복했다"라는 말과 함께.
이후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더욱 탄력을 받았고 후금과의 마찰은 인조반정 전까지 없었다. 후금 역시 조선을 상당히 '후'하게 대접했다. 병자호란을 일으킨 후금이 내건 명분 중 하나가 바로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였다.
광해군이 전쟁을 무서워한 나약한 군주는 아니었다."힘이 있어야 중립도 지킬 수 있다"라는 당연스런 명제를 광해군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일본으로 부터 조총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수입했다. 화포 개량이 계속됐고 조총부대를 창설했다.
이 조총부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명나라가 원군 요청 제1 요구가 "조총부대를 보내라"였다. 당시 원군으로 파병된 조선 조총부대는 약 5천명이다. 내전 중인 일본에서도 이만한 조총부대는 사실상 존재치 못했다. 광해군이 만든 조총부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 화력 부대로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당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 조총부대 편입을 두고 서로 싸운 점을 보면 조선 조총부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광해는 명군?
위의 기술은 광해군을 명군으로 평가하는 평가의 이유들이다. 세종이나 영조 정조는 선왕들이 정적이나 분당을 약화시켜 왕권을 미리 강화시켜놨지만 왕권이 약화될대로 약화된 광해는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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