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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환영받지 못한 시구자, 추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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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始球). 사전적 의미는 ‘시즌 개막전이나 올스타전, 챔피언 결정전 등 특별히 의미 있는 경기를 치를 때, 경기에 앞서 유명 인사가 공을 던지는 것’을 말한다.

많은 이들이 '야구 종주국' 미국에서 시구가 시작된 것으로 안다. 아니다. 실은 일본이다. 1908년 방일한 미국선발팀과 와세다대의 친선경기가 열렸을 때 오쿠마 시노게노 와세다대 총장이 경기 직전 마운드에 올라 포수를 향해 공을 던진 게 시구의 기원이다. 당시 오쿠마 총장이 던진 공은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났지만, 총장의 공이 ‘볼’로 판정돼선 안 된다고 생각한 와세다대 1번 타자의 고의 헛스윙으로 스트라이크가 됐다.

이후 시구 때마다 타자는 시구자에게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헛스윙을 했고, 결국 이러한 배려는 훗날 시구문화의 관례로 자리 잡았다.

미국야구의 시구는 일본보다 2년 늦었다. 1910년 메이저리그 ‘워싱턴 세네터스’의 홈개막전에서 윌리엄 테프트 대통령이 시구한 게 최초의 공식 시구다. 테프트 대통령의 시구엔 사연이 있었다. 당시 테프트 대통령은 건강이 걱정될 만큼 비만이었다. 대통령의 측근들은 그런 테프트의 건강을 염려해 순전히 운동을 시킬 요량으로 시구식을 생각해냈다고 한다.

하지만, 단발로 끝날 것 같던 미 대통령의 시구는 훗날 역대 대통령들이 해마다 메이저리그 개막식 시구자로 나서며 비중있는 연례행사로 발전했다.

한국야구의 시구사(史)는 미국, 일본과 달리 도입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프로야구는 명확하다.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의 출범을 기념하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금은 철거된 서울운동장에서 개막전으로 열린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에서 시구자로 나선 게 출발이었다.

추신수의 시구 불발 배경은 '비'가 아니었다.


추신수. 한국인 메이저리거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주축 외야수다. 빅리그에서 알아주는 선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0월 27일 열릴 한국시리즈 3차전 시구자로 추신수를 선정했다. 한국시리즈 시구자 선정은 KBO의 몫이다. 하지만,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다. 내정만 했다. 그러다 소식이 알려졌다.

반응은 뜨거웠다. 즐거운 뉴스였다. 팬들 사이에선 ‘과연 추신수가 시속 몇 km의 강속구를 던지겠느냐’가 이슈로 떠올랐다. 추신수의 부산고 동기동창 정근우는 “옛날을 떠올리며 시속 150km 강속구를 던질 생각은 하지 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유가 있었다.

추신수는 고교 시절 이름난 투수였다. 좌완 강속구 투수로 유명했다. 그런 추신수이기에 색다른 시구가 될 게 분명했다. 추신수는 KBO의 제안을 받고 흔쾌히 승낙했다. 되레 고마웠다.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시구자로 선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었다. 그 영광이 자신에게 주어져 기뻤다. 고국 팬들께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추신수는 애초 10월 31일 귀국하려 했다. 하지만, 6일 앞당겨 25일 입국했다. ‘3차전 시구 제안을 받은 만큼 빨리 귀국해 준비해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시구 준비도 많이 했다. 문학구장에 모인 팬들에게 실망스런 시구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추신수는 한술 더 떠 27일 3차전에 앞서 하루 일찍 서울에 올라오려 했다. “하루 일찍 올라 와 준비하는 게 예의인 것 같다”고 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추신수의 시구는 그러나 26일 오후 전면 스톱(STOP)됐다. 돌발변수가 발생한 까닭이다. 바로 유니폼 때문이었다. 추신수는 3차전 시구자로 선정돼 입국할 때만 해도 무슨 옷을 입고 마운드에 서야할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영광스런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선·후배, 고국팬들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릴 수 있을까’였지 ‘어떤 복장으로 마운드에 올라야 하느냐’는 아니었다.

하지만, 3차전 홈팀인 SK 생각은 달랐다. SK는 “추신수 선수가 우리 유니폼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KBO에 전달했다. KBO는 이를 추신수 측에 전달했다. 추신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주춤했다. 진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SK가 KBO에 재전달한 전의는 다음과 같았다.

“3차전 홈구장이 문학구장인 만큼 SK 유니폼을 입고 시구하는 건 당연하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1차전 시구자 탤런트 김하늘 씨도 삼성 유니폼을 착용한 채 시구했다. 만약 추신수 선수가 우리 유니폼을 입지 않고 시구한다면 SK 팬들의 반응이 매우 부정적일 것이다. 만일 SK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면 시구는 곤란할 수 있다.”

추신수도 SK의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추신수는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SK의 요청을 승낙하기엔 그 역시 곤란한 처지였다. 추신수 측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SK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추신수가 연예인이었다면 SK 유니폼을 입는 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추신수가 현역 메이저리거이기 때문에 SK 유니폼을 입는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추신수는 클리블랜드 소속이다. 소속구단이 분명히 있는데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다면 클리블랜드에서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SK 에이스 김광현이 프로농구 시구자로 나섰는데 통신경쟁사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고 치자. 그럼 입을 수 있겠는가. 둘째, 아직 10월이다. 추신수가 클리블랜드로부터 연봉을 받는 ‘활동기간’이다. 이 활동기간에 다른 팀 유니폼을 입는다면 ‘해단(害團)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다. 우리의 곤란한 입장을 SK에 전달했지만….”

SK는 추신수의 입장을 전달받고 고민했다. 그러나 ‘SK 유니폼을 입었으면’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SK가 내세운 ‘우리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또 다른 당위성은 바로 ‘추신수가 SK 지명선수’라는데 있었다.

“2007년 국외파 특별지명 당시 추신수는 SK의 지명을 받았다. 만약 추신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이어간다면 SK에 입단해야 한다. 이 사실을 SK 팬들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추신수가 SK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고 치자. 우리 팬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 역시 추신수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추신수 측은 “국내에서 활동한다는 전제 아래 추신수가 SK 선수지, 지금은 아니지 않냐”며 “클리블랜드도 SK가 추신수를 특별지명했다는 걸 아는데 만약 그런 상황에서 SK 유니폼을 입는다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추신수 측은 “우리의 입장을 SK가 잘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입장을 주고받으며 SK가 마지막으로 내세운 이유는 “우리 입장도 곤란하긴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2009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탤런트 김남주 씨가 문학구장에서 시구를 맡았다. 당시 김 씨가 홈팀 SK 유니폼을 입기로 했는데, 남편 김승우 씨가 활동하는 연예인 야구단 ‘플레이보이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섰다. 그때 팬들 사이에서 ‘왜 SK 유니폼을 입지 않았느냐’는 항의가 많았다. 그때 이후 KBO와 구단 관계자들이 모여 ‘앞으로 한국시리즈 시구자는 홈팀 유니폼을 입히자’는 암묵적 동의를 했다. 그런 동의가 있었기에 추신수도 예외가 돼선 곤란하다는 게 우리 입장이다.”

그러나 추신수 측은 “SK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면서도 “199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당시 LA 다저스에서 뛰던 박찬호가 양복을 입고 시구한 바 있다. 추신수는 김남주 씨보다 박찬호에 가까운 케이스”라고 강조하며 “SK 유니폼 대신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면 안 되겠느냐”고 KBO에 중재안을 타진했다. 그러나 SK는 “박찬호가 시구할 땐 국외파 특별지명 이전이고, 6차전은 잠실 중립지역 경기였다”며 “SK 유니폼이 아니면 곤란하다”는 뜻을 재확인했다.

KBO가 가운데서 절충을 시도했지만,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며 결국 추신수의 시구는 ‘없던 일’이 됐다. 세간엔 27일 비가 오며 자연스럽게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26일 오후에 시구가 취소됐다. 그러니까 비가 문제를 봉합시킨 것이다.

KBO 관계자는 “SK측에서 ‘차라리 5차전 이후 중립지역 경기 때 추신수를 시구자로 선정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추신수가 어디 아무 때나 전화해 ‘오늘 시구자로 나와주세요’ 할 수 있는 선수냐”며 “추신수가 일정을 양보해 그나마 27일 3차전 시구자로 선정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추신수는 26일 오전부터 인천에 가려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27일 오전까지도 SK가 입장을 양보해줄까 기대하며 교통편을 수배했다. 하지만, SK의 입장 변화는 없었고, 비까지 내리며 시구는 취소됐다. SK 역시 추신수가 양보해주길 바라며 시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KBO는 3차전 추신수 시구가 비로 불발되자 5차전 시구를 알아봤다. 중립지역이라, 유니폼 문제가 발생할 리 없었다. 추신수도 “영광스런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일정을 비워두겠다”고 했다. 그러나 5차전은 이미 시구자가 내정돼 있었다.

추신수는 고국팬들을 만나려 서둘러 귀국했다.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을 양보하며 하루 일찍 인천으로 오려 했다. 그곳에서 선·후배들과 해후하며 자신을 응원해준 야구팬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추신수의 작은 소망은 물거품이 됐다. SK 역시 특별지명 선수인 추신수가 문학구장에 마운드에 오르는 걸 보고 싶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시구 불발 건은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입장의 문제였다. 추신수는 소속구단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SK는 추신수 이전에 홈팬들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추신수가 대승적 양보를 했다면 그건 해단 행위가 될 것이고, SK가 통 큰 결정을 했다면 일부 팬들의 비난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 문제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 한국시리즈의 근원적인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과연 한국시리즈가 두 팀만의 잔치인가. 만약 그렇다면 전체 야구팬은 이 시리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그이들의 눈엔 삼성과 SK의 정규 시즌 7차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리즈로 비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기에 우리는 두 팀의 최종전을 ‘한국시리즈’로 부르고, ‘가을 축제’라고 칭하는 것이다.

시청률 조사회사 AGB닐슨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10월 28일 오후 2시 생중계된 한국시리즈 3차전 전국 시청률은 8.5%였다.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구미지역 시청률은 13.8%에 달했다. 동 시간대 방영된 지상파 유수의 예능 프로그램보다 훨씬 높은 시청률이었다.

이것이 한국시리즈다. 삼성, SK팬을 넘어 전체 야구팬들이 보는 경기가, 한국야구팬이 팬심을 떠나 한국 프로야구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 지켜보는 경기가 바로 한국시리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시리즈 시구도 바뀌어야 한다. 홈팀 유니폼에 집착하지 않고, 전체 야구팬이 하나가 되고, 전체 야구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시구가 펼쳐져야 한다. 또 그런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2009년 미국 월드시리즈 1차전의 시구는 ‘시구가 연예인과 정치인의 홍보터로 전락하지 않고, 홈팀팬만을 위한 잔치로 끝나지 않을 때 얼마나 무한한 가치를 생산해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훌륭한 장면이었다.

당시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1차전에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 여사는 부통령 부인인 질 바이든 여사와 함께 양키스 출신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를 부축하며 마운드에 올랐다. 홈팀 양키스 관중은 ‘양키스의 레전드’ 베라나 오바마 여사가 시구자로 나설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미셸 여사는 옆에 있던 토니 오디어노 예비역 대위에게 공을 넘겼다. 오디어노는 이라크전에서 교전 중 왼쪽 팔을 잃은 참전군인이었다. 군복 정장 차림의 오디어노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공을 쥔 뒤 힘차게 투구했다.

시구가 끝나자마자 양키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경의와 존경의 눈빛으로 오디어노를 향해 기립박수를 쳤고, 오디어노는 관중의 박수에 의수가 달린 왼팔을 들어 답례했다. 야구 시구가 미국민을 하나로 묶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는 장면이었다.

2010년 천안함 사건에 희생된 전몰장병 가운데 야구팬이 있다는 소릴 들었다. 그의 부모가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섰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야구장을 찾은 아이들은 야구 이상의 가치를 전달받지 않았을까. 물론 야구장이 ‘애국의 장’이 될 필요는 없다. 애국은 강요의 문제도 아니다.

정작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야구’라는 공놀이를 공놀이 이상의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음에도 우리 스스로 그 가치 생산에 소홀한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다. 내년 한국시리즈에선 유니폼 때문에 모두가 곤혹스러운 시구가 아닌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시구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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