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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바지의 의인' 세월호 영웅 김동수씨, 삶 송두리째 곤두박질 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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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을 출발해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사고로 인해 탑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만이 구조됐으며, 300여 명이 넘는 사망·실종자가 발생해 2014년 대한민국의 안전불감증이 자초한 인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특히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로 가기위해 세월호에 탑승, 못다핀 어린 학생들의 희생이 많아 전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침통을 안겼다.
 
참사가 일어난 후 사망자 및 생존자들이 찍은 영상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파란바지를 입고 소화호수를 몸에 묶은 채 학생 20여 명을 구한 세월호의 영웅 김동수씨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현재 그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영웅으로서의 대접은 커녕 정부의 철저한 외면 속에 하루하루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김동수씨는 제주에 살고 있는 가족의 가장으로 화물기사 일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여느날과 다르지 않게 화물차에 짐을 싣고 제주로 가기 위해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세월호에 차를 적재하고 2층 화물기사들이 머무르는 선실에 있었다. 
 
사고당시 그는 배가 기울기 시작할즈음 당황을 하거나 두려움 보다는 "배가 왜 이렇게 기울지?"라는 의문을 가졌으며, 배가 약 45도 이상 기울였을 때 배에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동료들과 침대 사다리를 잡고 가까스로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는 "화물기사들이 있는 방에는 사다리나 다른 철제 가구들을 잡고 갑판 위로 올라갈 수가 있었으나 많은 희생자가 발견된 로비나 학생들의 방에는 무언가 잡고 갑판으로 나오기란 사실상 어려웠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현재까지 김씨가 받은 정부의 지원금은 4인 기준 1가구에 책정한 긴급생계비 월 108만원으로 이 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끊길 예정이며, 정부가 2014년 정한 4인가구 한 달 최저생계비 163만원에도 안되는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이다. 그나마 세월호 피해구제대책 특별법 초안에 담겨진 화물배상은 제외하겠다는 방침은 제주도청을 방문한 화물기사들의 민원제기를 통해 생계형까지는 보상을 해준다는 도청의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세월호 사고 당시 학생들을 구출하면서 입은 치아 부상과 근막통증증후군(충격을 갑자기 받거나 무리했을 시 오는 병)으로 인해 근육 이완제를 맞지 않고서는 왼손을 사용하기 불편한 상황이다. 정신적인 고통은 이보다 더해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에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없는 공황장애 및 극심한 불안증세에 심지어 횡설수설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요근래에는 잠을 잘 수도 없을 정도의 속 쓰림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었지만 병원측은 세월호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라는 답변으로 입원비는 모두 본인 김씨의 몫이 됐다.
 
정부는 세월호 피해자들을 위한 할부금 상환기간을 유예해줬으나 이마저도 끝나고 있으며, 트럭기사들에게 초저금리 대출을 제공하고 생활안정자금 명목으로 2,000만원 저이자 대출의 기회를 제공했으나 일상생활로 복귀해 생업을 이어가기란 쉽지않은 건강상태에서 무용지물과 같은 정부 정책은 눈쌀만 찌푸러지게 한다. 
 
현 상황에서 생업을 포기하고 치료에만 전념해도 완치하기란 쉽지 않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는 김씨의 모습은 세월호의 영웅이 이 시대가 낳은 또다른 피해자로 보였다.
 
김씨는 마지막으로 "영웅, 의인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무의미하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신경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국민들에게 너무 쉽게 세월호가 잊혀지는 거 같아 안타깝다"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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