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심사

임창용 "직구 128㎞ 언더핸드, 난 B급이었다"

728x90
반응형

임창용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의 성장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임창용은 고교 2년때만 하더라도 언더핸드스로였으며 직구 최고시속이 130㎞를 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최고 160㎞까지 기록한 최고마무리 임창용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그야말로 삼류였다는 것이다. 임창용이 28일 오후 IB스포츠와의 국내 매니지먼트 계약 발표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다. 송정헌 기자 songs@sportschosun.com
임창용과 사는 얘기, 살아온 얘기를 나눴다. 시속 130㎞에도 못 미치는 직구를 던지던 '언더핸드스로 꼬마'의 인생 역전 과정은 흥미로웠다.

임창용은 28일 오후 IB스포츠와 국내 매니지먼트 계약 발표회를 가졌다. 공식인터뷰는 현장에서 이뤄졌다. 그후 임창용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지난달 말 야쿠르트와 3년간 15억엔의 초대형 계약에 성공한 뒤 두문불출하면서도 일본을 오가느라 바빴던 임창용이다.

임창용과의 저녁식사는 꽤 오랜만이었다. 취재수첩, 볼펜 같은 건 아예 꺼내지 않았다. 인터뷰 형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밥 먹으면서 슬쩍슬쩍 이런 저런 거 물어볼테니 그게 인터뷰라고 생각합시다"라고 하자, 임창용은 "그럼 저도 슬쩍슬쩍 답할게요"라며 웃었다.

▶기억속에 각인된 "넌, 안돼!"

지글~ 지글~. 석쇠 위에서 고기가 알맞게 구워지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집으려다, 문득 예전부터 갖고 있던 궁금증 하나를 질문으로 던졌다. "임창용 선수 투구폼은 언제봐도 멋있다.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팔이 많이 젖혀지니까 꼭 활 쏘는 것도 같고. 처음부터 사이드암스로였나?"

임창용은 "처음엔 언더핸드스로로 시작했어요"라고 했다. 이어지는 옛 이야기. "난 정말 (투수로서) 혼자 큰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지도자에게 칭찬을 들은 적이 없어요. 늘 자극만 받았죠. '넌 안돼!', '절대 안돼' 같은 얘기만 줄창 들었던거죠."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 마무리투수로 검증된 그가 어린 시절엔 속칭 '삐꾸'였다고 한다. B급의 일본어 발음 '비큐'의 변형으로 알려진 용어. '삼류선수'란 의미다.

임창용은 "고2때만 해도 언더핸드스로였는데 힘껏 던져봐야 직구 최고시속이 130㎞도 나오지 않았어요. 키도 1m70이 안 됐구요. 비리비리한 제가 느릿느릿한 공만 던지니 가능성이 없어보였겠죠"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하긴, 임창용이 2007년 말 일본에 처음 진출할 때도 야구인들은 비슷한 반응이었다. "걔, 지금 공으로 일본 가서 되겠어? 절~대 안돼."

▶파리도 앉을 직구, 애프터 버너 점화

1년 선배인 이호준(SK)과 매우 친한 사이다. 임창용은 "어릴때 내 공이 하도 느리니까 호준이형은 '창용이 공은 일단 주저앉아 도시락 하나 까먹고 난 다음에 천천히 일어나서 치면 된다. 그때쯤 홈플레이트 통과하고 있으니까'라고 놀리곤 했다"고 말했다. 파리가 날아와 앉을만한 공이라는 농담이었다.

광주진흥고 3학년으로 올라갈 때 변화가 생겼다. 키가 1m77까지 자랐고 체중도 붙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팔을 올려 사이드암스로 스타일로 바꿨다. 임창용은 "공이 빨라졌다. 고3때 직구가 144㎞까지 나왔다. 결국 내 가능성을 본 해태가 지명했다"고 말했다.

해태 입단후 키가 1m80을 넘었다. 프로 초년병 시절부터 시속 155㎞ 포심패스트볼을 뿌렸다. 일본 진출후에는 160㎞를 기록하기도 했다. 평균 128㎞짜리 직구를 던지던 '모자란' 투수는 이제 '야구장에 뱀을 푸는 남자'로 변신했다. 임창용의 꿈틀대는 듯한 포심패스트볼을 팬들은 '뱀직구'라 부른다. 내추럴 슈트성의 포심패스트볼이 오른손 타자 몸쪽으로 콱 박힐 때 야구팬들은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나, 정말 할 수 있을까

임창용은 2005년에 투수 생명을 건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다. 2006년 복귀해 1경기를 뛴 뒤 2007년에 본격적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5승7패, 방어율 4.90. 오승환에게 마무리를 내주고, 선발진엔 끼지도 못하는 찬밥 신세가 된 임창용은 오랜 꿈인 해외진출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만 해도 직구 구속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구속이 빨라지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없었는가"라고 질문했다. 임창용은 "솔직히 스피드는 분명히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내 자신이었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통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됐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 각인된 "넌, 안돼"라는 자극이 30대 초반의 임창용에게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번엔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었다. 차츰 자신감을 갉아먹힌다는 생각이 들 무렵. 임창용은 미련없이 일본으로 떠났다. "안 되면 말지, 뭐." 단순한 해답을 찾은 채로 말이다.

그후 임창용은 3년간 일본 톱클래스 마무리로 입지를 굳혔다. 일본 첫해, 첫 전훈캠프 첫날, 임창용을 '삐꾸 용병'으로 쳐다봤던 야쿠르트 선수들은 이제는 둘도 없는 동료가 됐다. 임창용을 존경의 눈으로 쳐다보는 젊은 투수도 많다. 임창용을 단순히 '토미 존 서저리'의 성공사례로만 설명해선 안될 것 같다. "넌 안돼"라는 타인과 자신의 시선을 모두 이겨낸 게 더욱 큰 부분일 것이다.

▶마지막 변수, 돈이 아니었다

밥 대신 누룽지를 먹는 동안에도 임창용은 야구 인생과 최근의 상황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다. 요미우리와 계약할 수도 있었던 사연, 메이저리그에 대한 의욕, 오승환과의 인연, 기억나는 감독 등 추후 조금씩 지면을 통해 소개하겠다.

돈 얘기를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총액 기준일때 우리 돈으로 200억원이 넘는 계약서에 사인했다. 한국 시절의 그는 FA 타이밍과 해외진출 의욕 때문에 흔히 말하는 '대박 계약'을 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간 받은 연봉도 가족을 위해 대부분 썼다. 사실상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다고 임창용은 털어놓았다.

"200억원 생기면 어떤 기분인가. 그 연봉 주려면 야쿠르트 스왈로즈 모기업이 제품을 정말 많이 팔아야겠다"고 농담을 건넸다. 임창용은 "아직 통장에 한푼도 안 들어와서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어요"라며 웃었다. 이어 "(야쿠르트가) 참 고마웠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절의 나를 받아줬고 잘 대해줬으니까. 내 첫번째 선택은 야쿠르트에 남는 것이었다. 높은 연봉까지 받게 됐으니 팀에 너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의리. 임창용은 그걸 중시한다. 한국인선수와 관련, 요미우리가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패한 건 두번째다. 95년말 투수 선동열이 나고야로 갈 때 환영받았던 건 요미우리를 택하지 않은 덕분이다. 임창용 역시 야쿠르트 팬들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