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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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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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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
출생 1959년 4월 10일(1959-04-10) (53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동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직업 현.광역단체장, 정치인, 공무원
정당 민주통합당 [1]
배우자 채정자
웹사이트 http://governor.gsnd.net

김두관(金斗官, 1959년 4월 10일 남해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민선 5기 제34대 경상남도지사이다. 기초자치단체장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 등을 지냈다. 참여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데다 직설적인 화법과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하는,[2] 대표적인 친노 인사로 알려진 정치인이다.

목차

[숨기기]

[편집] 생애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낙향해 남해 농민회 사무국장(1987년), 민중의 당 남해·하동 조직책(1988년), 남해신문 발행인(1989년-1995년)을 역임하며 농민운동을 했으며, 1995년 초대 지방선거1998년 2회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남해군수에 당선됐다. 대한민국에서 민선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 기록을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다.

[편집] 남해군수 시절

김두관은 남해군수 시절 독특한 행보로 유명하다. 당시 36살의 젊은 나이로 군수가 된 김두관은, 취임 직후 기자구락부를 폐쇄하고, 공무원과 지역 언론사와의 유착 관계를 근절했다. 또한 취임 직후 군수 관사를 철거하고, 그곳을 민원인 쉼터와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등 파격적인 행정을 열었다. 김두관은 3대째 살고 있는 낡은 집에서 출퇴근했다.

전국 번지점프대회를 남해대교에서 개최했다. 김두관은 군수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직접 번지점프를 하여 당시 화제가 됐다.

또한 민원인 공개법정을 열어, 민원인들과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지 않고, 공개적인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렸다. 이렇게 해서 남해군의 골치병이었던 어장 분쟁 등을 해소했다. 1970년대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 등 파독 교포들이 한국에서 쉴 수 있도록 '독일인 마을'을 만들었다. 또한 남해에 스포츠 파크를 만들어서 여러 나라의 국가대표들의 전지훈련장이 됐다.

이와 같은 김두관 체제는 당시의 지방자치 환경으로 보면 교범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로 인해 지자체 각종 평가에서 모두 1위를 했고, 환경시범도시 선정, 환경대상 수상 등 각종 수상과 찬사가 이어졌다.

[편집] 노무현과의 인연

원래는 2002년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도전하려 했으나, 당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권유로 고심끝에 민주당에 입당하여 경남도지사에 출마했다. 비록 한나라당소속의 김혁규 경남도지사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당시 YS와 접촉하던 노무현에게 직언을 하는 등의 소신 행보를 보여 일각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됐다.

이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2003년 2월 25일 참여정부가 출범하면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발탁되며 상당한 파격 인사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2003년 8월 한총련이 전쟁반대를 목적으로 포천에서 훈련을 하던 미군 스트라이크부대 사격 훈련장에 진입, 불법적으로 기습시위를 하면서 성조기를 불태우고 장갑차를 점거하는 행동을 보인 것으로 인해 한미간 우호적 관계 악화, 치안 부재, 경비소홀 등의 책임론이 당시 거대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의해 제기됐다.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민주당의 만류와, 김두관과 동향인 한나라당 중진 박희태 의원의 지도부 설득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안이 2003년 9월 3일, 여소야대 정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한나라당에 의해 가결됐다. (한나라당, 자민련 의원만 출석, 160명 표결, 찬성-150표, 반대-7표, 기권-2표, 무효-1표)

노무현 대통령은 김두관 장관에게 국회를 설득하라고 지시했고, 철회 안을 요구했으나, [3] 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무현 대통령은 태풍 매미의 피해를 수습한 후에 적절한 시기에 해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해 9월 17일, 김두관 장관은 사표를 제출했고, 현직 장관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는 상태에서 후임자 인선을 발표했으며, 허성관 해양수산부 장관이 새 행정안전부 장관직에 내정됐다.[4](해양수산부 장관에는 최낙정 해양수산부 차관이 내정됐다) 9월 19일, 정부 종합청사에서 두 신,구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임식, 취임식을 가졌다.

당시 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해임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대답이 높았다. (거부권 행사58%/해임안 수용42%)[5]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헌정사상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가 될수도 있었다.

이후 2004년 총선에서 경남 남해·하동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의 중진 박희태에게 7천여표차로 패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중앙위원(2004년-2007년), 청와대 정무특보(2005년-2006년)를 차례로 지냈으며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경남도지사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소속의 김태호 경남도지사에게 50여만표차로 참패했다.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됐다.[6]

2009년, 10월, 경남 양산의 재보궐선거에서 참여정부 출신 송인배 행정관이 출마를 하자, 김두관 전 장관은 문재인 전 비서실장,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현.충남도지사)과 함께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7]

[편집] 노무현 이후

2010년 4월 26일 경상남도지사로 출마하여 야권단일후보로 결정됐다. 희망자치만들기경남연대와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참여한 야권단일후보 경선에서 전국 최초로 야권단일후보로 선정됐으며 같은 해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달곤 후보와 경쟁하여 1위로 당선됐다.[8] 이 과정에서 김두관은 당선축하 화환 대신에 '쌀을 보내오면 불우이웃을 돕는데 쓰겠다'고 했으나 선관위측에서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하여 이를 번복하기도 했다. 네티즌들은 '수십만원짜리 화환은 합법이고, 불우이웃 돕는데 쓰는 쌀은 불법이냐'며 선관위측을 비판하기도 했다[9]

그는 경상남도지사가 되어 낙동강의 4대강 사업에 반대했지만 박지원은 그를 지지했다.[10]

그는 정부의 낙동강 사업 회수권을 반대하는 소송에서 3가지 이유를[11] 말했다:

  • 정부의 사업권 강제회수 자체가 부당하기 때문
  • 진실에 눈감지 않았고, 도민의 입장에서 낙동강사업을 걱정하는 목소리에 대해 경남도가 대처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
  • 우리가 하는 일이 정의롭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

[편집] 역대 선거 결과

제1회 지방선거 남해군수 38대(민선 1기) 무소속 53.5% 21,605표 1위 경남지사 당선
제2회 지방선거 남해군수 39대(민선 2기) 무소속 52% 18,605표 1위 경남지사 당선
제3회 지방선거 경남도지사 31대(민선 3기) 새천년민주당 16.9% 208.641표 2위 낙선
제17대 총선 국회의원(남해·하동) 17대 열린우리당 40.8% 26,747표 2위 낙선
제4회 지방선거 경남도지사 33대(민선 4기) 열린우리당 25.4% 343,137표 2위 낙선
제5회 지방선거 경남도지사 34대(민선 5기) 무소속 53.5% 807,698표 1위 경남지사 당선

[편집] 약력

[편집]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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