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朴泰俊, 1927년 9월 29일 ~ 2011년 12월 13일)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기업인이다. 포항제철(포스코의 전신)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민주정의당 대표, 국무총리를 역임하였다. 한국의 "철강왕" 혹은 한국의 "카네기"라고 불렸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호는 청암(靑岩)이다.
생애 초반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태어나 6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자랐다.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하였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하였다.
[편집] 군 복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전쟁에 출전하여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포스코를 세계적 철강기업으로 성장시킨 그는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를(육사6기)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의 학사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가 (11기 이후) 뒤늦게 신설되어 정부차원의 학사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인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정규 학사 학위는 단국대학교가 유일하다.
5.16 군사 정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박정희가 쿠데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쿠데타 전날 가족을 맡겼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에 관여하였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하였다.
[편집] 정치 활동
예편 이후 경제인으로 변신, 1964년 대한중석 (현재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대한중석을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1968년 4월 포항제철의 초대 사장이 되어 10년 만에 연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일본의 미쓰비시 종합연구소의 "한국의 성공 기업을 본다"라는 제목의 1991년 연구보고서에서는 포스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으로 "모험사업 추진의 리더로서 지도력, 통찰역, 사명감을 충분히 발휘한 박태준 회장의 공헌"을 들고 있으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과 서울대가 공동으로 연구한 "포철의 경영 성공 사례" 1992년 보고서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포스코 성공의 가장 주요 요인으로 들고 있다. 또한 스탠포드대 경영대학원이 연구한 "한국의 발전과 포철의 역할"이라는 보고서에서도 역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1]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민주정의당, 전국구)로 당선돼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박태준은 포철 회장직을 임기 중이던 1992년 10월 물러났다. 박태준은 포철을 창업 25년이란 짧은 기간에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키운 한국철강업계의 명실상부한 대부이자 세계철강업계의 거목으로 꼽혀 왔다.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으로부터 포철을 지키는 울타리 역할을 해 온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정부와 불화로 결국 정권 수립 직전에 회장직을 내놨다. 1992년 10월 5일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은 당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박 명예회장은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포철은 긴급이사회를 소집, 박 회장의 사퇴번의를 촉구키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2] 이와 같이 김영삼과의 불화로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김영삼 집권 이후 포철 협력사들로부터 39억여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한동안 외국을 떠돌았는데, 여기에는 표적수사라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적 실패를 공격하면서 포항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하여 당선됨으로 재기에 성공하였다.
국무총리 시절
1997년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의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선을 지원하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궁지에 몰려 재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하였다.[3] [4]
[편집] 말년
포스코의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매년 포스코 청암상을 수여하는 것에 참여하였다. 2011년 12월 13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호흡 곤란 증세로 치료를 받고, 회복 중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향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2001년에는 미국 코넬대병원에서 폐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편집] 기타 업적
[편집] 사원 주택단지 조성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사원들의 복지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편집]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편집] 제철장학회, 포스코청암재단 설립
1971년에 6000만원을 종자돈으로 포스코청암재단의 토대가 된 제철장학회를 설립,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 냈다. 기존 장학재단을 확대해 그의 호인 ‘청암’을 따서 2005년 9월 새롭게 출범한 포스코청암재단은 현재 아시아의 교류와 협력을 위한 포스코아시아펠로십, 차세대 인재육성, 참여와 나눔 실천의 3대 전략 아래 대한민국이 포함된 아시아를 대상으로 11개의 공헌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 6월 16일 포스코센터에서 이사회를 열고 박태준을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포스텍(포항공과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해마다 장학금으로 청암상을 수여하고 있다.
[편집] 에피소드
- 박태준은 최형우 의원과 동향(경남 동래)이자 정파를 뛰어넘은 우정으로 유명하다. 10월 유신 당시에는 옥중에 있던 최형우를 대신해 그가 최형우의 모친을 돌봤다고 하고, 문민정부 출범 이 후에는 최형우가 그를 대신해 기장에 거주하는 그의 모친을 돌봤다고 전해진다. [6]
- 대표이사 재직시절에 포항에 제철소를 건설할때 자금부족으로 공사중단 위기에 놓이자 일본 선진업계의 도움으로 대일 청구권 자금지원으로 착공하기에 이른다.
만일 포항제철소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지 못하면 포항 앞바다에 투신하겠다고 공사 인부들을 독려하였다. 이로써 포스코는 세계최대의 철강기업으로 도약하였다.
[편집] 평가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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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국민의 정부에 협력한 것을 두고 우익 세력의 일각에서는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편집] 가족 관계
- 부: 박봉관(사망)
- 모: 김소순(사망)
- 배우자: 장옥자(張玉子, 1931.05.12-)
- 장남: 박성빈(朴成彬) - 미국 실리콘밸리 스리컴 근무
- 장자부: 정지윤
- 장인: 정도원 - 삼표 회장
- 장녀: 박진아(朴進雅, 1957.04.30-)
- 장서: 윤영각(尹榮恪, 1953.12.04-) - 삼정KPMG그룹 대표이사
- 차녀: 박유아(朴裕雅, 1961-) - 한국화가
- 사녀: 박경아 - 디자이너
- 사서: 전재용 - 이혼
- 전두환 전 대통령 차남
- 사서: 김병주(1962-)
- 미국 칼라일그룹 아시아회장 겸 이사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대표하는 단어는 ‘청빈(淸貧)’이다. 그는 “나는 지금껏 국가의 소명을 받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정치인으로서 드물게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자손들에게 유산도 한 푼 남기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유족 측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정KPMG 부회장은 이날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브리핑을 통해 “박 명예회장님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은 “박 명예회장님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며 “병원비도 자기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워 자녀들이 분담했고 본인 명의의 집도 없고 주식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평소에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면서 “큰딸의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박 명예회장은 의식을 잃기 전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포스코가 국가경제 동력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만족스럽게 생각한다”며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고가 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박 명예회장은 임직원들에게는 “애국심을 가지고 일해 줄 것”을 당부했으며 가족들, 특히 부인(장옥자 여사)에게 “고생시켜 미안하다. 화목하게 잘 살라”는 뜻을 전했다. 또 “포스코 창업 1세대들 중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안타깝다”는 심경도 밝혔다.
거목을 잃은 재계는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논평을 통해 “박 명예회장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의 쌀’인 철강산업을 일으켰다”며 “경제계는 ‘제철보국’의 정신으로 헌신하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의 경제난국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삼성그룹은 “고인은 ‘절망하지 말고 무엇이든 세계 최고가 되자’는 신념으로 우리나라 철강산업은 물론이고 경제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며 경의를 표했다.
정치권도 박 명예회장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가까웠던 이양희 전 의원은 “고인은 세계적인 흐름을 정확히 파악했고, 인간적 신의가 커서 공직을 떠난 뒤에도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고 추모했다. 민주당 이용섭 대변인은 논평에서 “비록 파란만장한 인생이고 영욕의 삶이었지만, 고인께서 군인 기업인 정치인으로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빈소를 찾은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박 명예회장은 사욕이 없으셨다. 주위 사람들을 맘껏 도왔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생각했다”며 “기업인들의 큰어르신이 너무 빨리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진념 전 부총리, 이기수 대법원 양형위원장, 강덕수 STX그룹 회장 등도 이날 밤 늦게 빈소를 찾았다. 장례 절차는 14일 오전 정해질 예정이다.
- 미국 칼라일그룹 아시아회장 겸 이사
- 사서: 전재용 -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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